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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잌 Nov 08. 2019

몸이 부서져라 춤추는 인생

쿠바,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무너뜨리기       

'쿠바에 가면 세 가지는 무조건 하는 거야. 모히또를 잔뜩 마시고, 시가를 피우고, 살사를 배우자!'


...라고 나를 꼬시던 친구가 느닷없이 엄마가 편찮으시다며 쿠바 여행을 펑크 냈다. 나는 그 무렵 중학교 이후로 스물일곱 번째쯤 찾아온 것 같은 '제2의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기에 어디든 떠나야 했다. 친구 믿고 따라가려던 쿠바 여행은 그렇게 혼자 가게 되었다. 모히또, 시가, 살사만 중얼거리며.


출발한 지 32시간이 지나 아바나에 도착했다. 기진맥진해서 까사(숙소)에 짐을 풀고 오후 내내 죽은 듯이 잠을 잤다. 밤에 말똥말똥 잠이 깨어 불을 켜놓고 책을 읽자니 에어컨은 킬 때마다 정전이 되어 하룻밤 새에 무려 7번이나 전기가 나가버렸다. 더워 죽을 것 같다.


쿠바의 첫인상은 찌는 듯한 더위와 피곤, 잠시도 나를 가만 두지 않고 '치나(중국 여자라는 뜻)'를 불러대는 길거리의 남자들 때문에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이 곳에 머문 약 2주 동안 결국 이 나라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이 곳에선 날씨가 너무나 더워서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이게 된다. 많은 일정을 구겨 넣고 싶어도, 그렇게 돌아다니다간 죽어버릴 것 같아서 그저 터덜터덜 걷다가 커피를 마시거나 그늘에 앉아 쉬는 걸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아바나에서는 특별한 목적지 없이 무작정 직진, 느닷없이 우회전, 가끔 좌회전을 반복하며 마냥 걸었다. 며칠째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긴 것도, 지도 없이도 익숙해진 길을 걷는 느낌도 참 좋았다. 


동양인이 극히 드문 이 곳에서 나는 종종 시선을 끌었다. 지나가다가도 흠칫 놀라 나를 다시 쳐다보는 사람도 있다. 이때 웃으면 같이 생글 웃어준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음악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고, 어디서든 춤을 추는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게 계속해서 기분 좋은 놀라움을 선사한다.


모히또, 살사, 시가 중에서 가장 먼저 달성한 건 '모히또를 잔뜩 마시기'였다. 헤밍웨이가 사랑했다던 술, 그가 자주 출몰했다던 바. 대놓고 관광객이었던 나는 당연히 그곳에서 첫 모히또를 마셨고, 여행 내내 입에 모히또를 달고 살았다.


하지만 나를 쿠바와 사랑에 빠지게 한 것은 살사였다. 내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몸뚱이와 30년 가까이를 살아왔던 터라 그때까지만 해도 내 인생에 춤은 절대, 네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그래도 쿠바에 왔는데'라는 마음이 부추겨 아바나에서 3일짜리 살사 클래스에 등록을 해버렸다.


생각보다 살사는 재미있었다. 원투쓰리에 맞춰 발을 움직이고, 파트너가 보내는 신호에 맞춰 턴을 하거나 이동을 하면 되는데, 그 원투쓰리가 안돼서 발이 꼬이고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서 팔이 엉키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도 난생처음 몸으로 무언가를 표현하고 만들어 나가는 일을 한다는 게 짜릿했다.


춤을 추다 보면 사랑에 빠지는 기분이라고 했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춤을 출 때의 행복한 기분 때문인지 매번 살사 선생님과 사랑에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에 퐁당 담갔다 꺼낸 것처럼 온몸이 땀에 푹 젖을 때까지 매일 춤추던 기억, 작은 실수를 할 때마다 꾸중을 듣기보단 그저 선생님과 실컷 웃던 기억, 한 시간 수업이었지만 열중하다 늘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던 그 3일간의 수업이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결국 트리니다드에서 다시 한번 살사 클래스에 등록했다. 수업 마지막 날 저녁에는 살사를 배우던 장소에서 파티가 있었다. 각자 테이블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이 음악이 흘러나오자 너나 할 것 없이 가운데로 나와서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 두곡 정도가 지나고 점차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즈음 내 옆 테이블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 한분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더니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연세를 가늠할 수 없는 호호 할머니이였는데, 뼈 밖에 남지 않은 몸은 살짝만 건드려도 후드득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할머니가 무대 중앙에 도착하더니 이제 막 소년티를 벗기 시작한 젊은 청년과 몸이 부서져라 열정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저러다 무릎이 부서지던지 어깨가 빠지던지 뭔가 일이 나겠다 싶을 정도로 격렬한 움직임이었다. 한번 움직일 때마다 온몸의 뼈들이 사방팔방으로 튕겨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매혹적인 몸놀림의 아가씨들, 혈기왕성한 청년들, 노련함이 묻어나는 중년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단연 독보적이었던 할머니. 할머니의 관절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과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난 후에는 그 장면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독특함을, 현재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살이 찌든 말랐든 키가 크든 작든 나이가 적든 많든 간에 자신이 가진 몸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줄 아는 이곳 사람들이 내 몸의 부족한 부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지나치게 신경 쓰느라 웃지도 못하던 나의 모습과 대조되어 보였다.


심지어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춤을 출 때조차 나는 완전히 나를 내려놓지 못했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그저 자제하고, 숨기고, 자신 없어하는 데에만 익숙해져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금은 슬펐다. 그래서 날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쿠바를 떠나기 전에 다시 아바나로 돌아와서는 광장에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에서 '에라 모르겠다'의 정신으로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리듬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의 몸놀림을 실컷 분출하고 나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왠지 기분이 상쾌했다.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다.


쿠바에서 참으로 진심으로 행복했다. 벌써 10년도 더 전에 다녀온 여행이다. 반드시 다시 가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 떠나왔지만 늘 그렇듯, 그러지 못했다. 10년 전 그때의 기억을 소환해보고 싶은 마음에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덧. 시가는 선물용으로 코히바와 몬테크리스토를 구입했다. 체 게바라가 즐겨 피웠다는 몬테크리스토 한 개비는 하나 빼두었다가 서울에 돌아와서 친구를 불러내 길거리에서 나눠 피웠는데, 결국 컥컥거리다 반도 피우지 못하고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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