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나이프의 오로라, 버킷리스트가 없는 삶
직장생활이 무료해지기 시작할 무렵 생긴 나의 취미는 버킷리스트를 만드는 것이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꼭 해보고 싶고, 또 그 누구도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하지 못하고 미뤄온 일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 절대 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높은 그런 일들로 이루어진 리스트 말이다. 지구 끝까지 가서 영화 같은 일을 해야만 인생이 의미 있는 건 아닐 텐데, 그래도 명색이 버킷리스트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리스트의 반이라도 이루려면 최소 인디아나 존스는 되어야 했다.
세렝게티, 우유니, 이과수 폭포와 마추픽추, 타지마할, 갈라파고스, 그랜드캐년 가보기, 세계의 Top 10 스쿠버다이빙 스폿에서 다이빙 하기, 서핑, 스카이다이빙, 번지점프, 돌고래와 수영하기, 다큐멘터리 찍기, 가구 만들기, 그림 전시하기, 책 출판하기 등 이 환상적인 리스트는 끝도 없었다.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의 목록은 이상하게도 나의 일상과는 정반대 쪽 끝에 있었다. 마치 지금의 내 하루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듯이.
‘오로라 보기’ 역시 버킷리스트에 있던 것 중 하나였다. 그게 버킷리스트에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그해가 11년 주기로 돌아오는 태양 흑점 활동이 활발해지는 시기여서 오로라 관찰에 적기라는 기사를 우연히 읽어서인지 모르겠다. 어찌 됐든 2013년 겨울, 오로라를 보기 위해 캐나다 옐로나이프로 향했다.
옐로나이프는 추워도 너무 추웠다. 옷이란 옷은 모두 껴입고 그 위에 여행사에서 빌려준 캐나다구스 점퍼와 두꺼운 장화까지 신었지만 추위는 전혀 가시질 않았다. 길거리의 온도계는 -2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본 적도 없는 온도였다. 모자도 쓰고 목도리도 하고 마스크도 뒤집어쓴 채 눈만 내놓고도,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걷다 보면 마스크가 숨결과 콧물에 축축하게 젖어 차갑게 얼어붙었는데, 그렇다고 콧구멍을 내놓고 숨을 들이쉬면 그 숨이 얼어서 고드름같이 딱딱하게 콧속에 맺혔다. 매섭게 찬 공기가 폐로 들어가면 가슴이 아렸다.
낮에는 날이 조금 풀려 -10도 정도가 되었다. 현지 가이드는 간단한 후리스 차림이었는데, 우리를 보고는 그렇게 입고 북극이라도 갈 거냐며 웃었다.
밤이면 오로라 빌리지로 향했다. 오로라를 관찰하기 좋은 위치에 관광객들이 휴식할 수 있는 텐트('티피'라고 부른다)와 식당, 편의시설을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첫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지면 가까운 곳까지 내려와 춤을 추고 있는 거대한 녹색 커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얼어붙은 거대한 호수 위로 손에 잡힐 듯 선명한 오로라가 일렁이고 있었다. 저절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이 세상 광경이 아님이 분명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것이 출근 지옥철을 타고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는 나와 같은 세상에 있다는 건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같기도 했고, 춤추는 옷자락 같기도 했다. 정신을 잃을 듯 신비한 광경 앞에선 추위도 힘을 잃었다... 고 말하고 싶지만, 살아야 한다는 본능의 힘은 컸다. 두꺼운 부츠와 울 양말 두 겹을 뚫고 추위는 발가락을 씹어먹고 있었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고, 이가 쉴 새 없이 딱딱 부딪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오로라고 뭐고 일단 대피하자. 활활 타오르는 난로와 따뜻한 국물이 기다리고 있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몸이 조금 녹으면 다시 나왔다가 곧 쫓아 들어가길 반복했다.
다음 날은 본격적으로 추위에 대비했다. 관절을 구부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옷을 껴입고 발바닥과 발등, 발가락 위에 핫팩을 다닥다닥 붙였다. 몇 시간이고 바깥에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오로라는 그날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첫날에 오로라를 볼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게다가 그 오로라가 뉴스에 날 정도로 선명하고 강렬한 것이었다는 것도. 그럴 줄 알았으면 추워도 조금 더 참을 걸. 근데 모든 일이 그렇지 않나. 그럴 줄 알았으면. 그땐 그것이 나의 최선이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것이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더 소중하게 여겼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인생은 기회가 될 때마다 즐겨야지 나중을 기약하며 눈앞에 다가온 기회를 날려버릴 여유가 없다. 그런데 그걸 자꾸 잊는다.
오로라는 분명 살면서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경이로운 광경 중 하나였다. 아직까지도 그 기록을 깰만한 경험은 거의 없다. 아주 강렬하게 남은 기억이지만, 극히 짧은 기억이기도 하다. 예전엔 그런 반짝이는 별 같은 기억들이 무료한 나의 인생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렇게 영화 같은 일들을 리스트에 잔뜩 쌓아놓고 하나씩 지워가는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곳',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할 음식',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가 너무 많다. 그렇게 꼭 해야 할 것들 중 대부분을 경험하지 못한 채 살아온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이 부족하다고 느껴야 하는 걸까.
내 인생은 오로라를 보고 나서 한층 더 풍부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었을까? 오로라 앞에 섰던 나는 다시 출근길 지옥철에 올라 탄 나를 변화시켰을까? 일상을 단단하게 꾸려나갈 힘을 기르지 못한다면 오로라를 한번 봤다고 해서 내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진 않는다. 그저 가지지 못한 꿈같은 일들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살아간다면 아마 마추픽추를 간다고 해서, 스카이 다이빙을 하고, 돌고래랑 수영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걸 깨닫지 못한다면 오로라 같이 아름다운 것도 내 인생을 바꿀 힘이 없다.
오로라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지만, 그리고 그걸 직접 내 눈으로 볼 수 있어서 정말 행운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오로라를 보고 나니까 죽기 전에 꼭 오로라를 보지 않았더라도 괜찮은 인생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더 이상 버킷리스트가 지금의 인생과는 아무 연결고리가 없는 그런 모험들로 가득 차길 바라지 않는다. 인디아나 존스와는 이제 굿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