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세월을 반추하면서
된통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며 항해에 임하게 했던 태풍들도 모두 무사히 지나쳤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잘 나가는 속력을 붙여주어 순항시켜주니, 출항하며 현지 대리점에 통보해줬던 도착 예정시간을 몇 시간 앞으로 당겨서 새롭게 알려준 게 엊그제 오전이었다.
역시 청개구리를 닮은 날씨라서 그렇게 되는 걸까? 새로운 도착시간 통보를 해주고 한나절도 못 지나서 다시금 바람이 일더니 구질구질한 날씨로 변하고 있다.
결국 계속 이어지는 그런 기상 때문에 속력마저 평균 이하로 떨어지게 되었고, ETA 역시 재조정해서 고쳐줘야 하는 상태로 되돌아갔다.
오늘 점심을 먹고 난 후 12시의 정오 위치를 회사에 보고 하면서, 도착 시간을 산출해보니 하루가 늦어진 오전 10시에 파일럿이 승선하는 곳에 도착되는 걸로 나온다. 파일럿 사무실에 그 시간대로 전보를 넣어 주도록 당직사관에게 지시하고 브리지를 내려왔다.
요새는 배의 일이 좀 꼬이거나 귀찮은 방향으로 흘러갈 양이면 에이!, 까짓-거 12월이 되면 나 하고는 상관도 없어지는 건데..... 하는 심정이 자주 든다. 그로 인해 어지간하면 그대로 덮어두고 넘기려는 성향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지! 하면서도 그런 맘보로 되어 가는 내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려니까, 참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하며 때로는 지난 세월의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떠오르기도 한다.
어쨌거나 승선의 마지막 순간까지 유종의 미를 간직한 채 떠나야 한다고 얼마 전부터 설정한 목표를 향해 마음을 다잡기로 작정한다.
그런 결심의 재확인 말미에는, 유종의 미를 향해 내가 열심히 했다고 해서 알아주는 반대급부라도 있나? 하는 자문의 물음표가 불쑥 솟아오르기도 한다.
결코 그렇지 않지~ 하고 떠오르는 부정적인 대답에, 스스로의 처지가 외롭고 쓸쓸함 속에 팽개쳐진 인생이 아니었을까? 괜스레 지나간 세월에서 섭섭했던 사항에 대한 자조의 마음마저 든다.
이래저래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추스 린 후, 새삼 새롭게 세운 목표대로 하는 것이 내 앞에 남겨진 날들과 나를 위한 바람직한 일이니 예정대로 해보자! 하는 결심을 다시 세운다.
그런데 이게 뭐 란 말인가? <귀찮고 힘이 드는데 잠시 쉬었다 하지.>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슬그머니 내팽개쳐 두려는 행동을 마음 따로 몸이 취하려 하고 있으니....
이렇게 나 자신을 살펴보며 몸과 마음 모두 힘들고 지쳐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솟아나며 계속 이런 식으로 반복하다 가는 현재의 일을 모두 놓고 쉰다고 할 때 쉬게 되기는커녕 병어라도 걸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조차 생긴다.
아직까지도 맘으로 야 퇴직 후 배를 내리게 되면 편히 쉴 수 있다는 기대만큼은 의심치 않고 있지만, 지금껏 연가를 보내던 식으로 특별한 일도 없이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계속 가능할 수 있을까?- 은근히 깊게 생각해 보기가 두려운 상황이다.
사실 지나간 40년 가까운 세월 중에 챙겨 받았던 연가는 쉼이 끝이 나면 즉시 다시 배를 탈 수 있었기에, 승선할 때까지 맘 놓고 휴식을 취해도 거리낄 일이 없었지만, 금년 12월 이후 쉰다는 의미는 그때와는 많이 다르겠구나! 하는 짐작이 은근히 고개 들어 더 이상의 구체적인 생각일 랑 슬그머니 얼버무리고 있는 셈이다.
집에서 아내가 은근히 걱정하는 방향이 바로 그런 것 일거라는 걸 눈치로 점쳐보고 있다.
그래도 모른척하고 있는 건 어쨌거나 현재의 승선 생활을 접고 집에 가만히 있게 된다는 변화가, 좋아지는 일보다는 간섭 당하는 일이 점점 더 늘어나고, 신경 써야 하는 일의 강도마저 더욱 깊어질 것이란 짐작 때문이다.
아직 겪어 보질 않은 육상에서의 일들 보다는, 각종 규제가 늘어나고 있는 작금의 해상 생활의 어려움이 더 힘들 것이란 나름대로의 현실 직시가 명예퇴직의 소용돌이를 우습게 알고 있는 건지 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껏 배를 탔던 일보다 육상의 일이 더 어려울 게 없을 거란 자신감조차 품어보려 하면서 우선은 배가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기 전에 떠나는 것이 여생에 보탬이 될 거란 식의 논리를 가져보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수행해 온 평생의 해상생활이 여러 면에서 육상 생활과 비교해 공평치 못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의식을 종종 가져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속한 해운산업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현장을 차지하고 있는 게 자신이라고 스스로를 추켜세우며 생각하고 행동해 왔건만, 해운회사 육상 근무자를 포함한 모든 이 들로부터 오히려 아웃사이더 취급을 당하며 살아온 현실이 그런 섭섭함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이다.
이제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내며 해상을 떠나야 하는 마당에, 새로운 현실인 육상에서의 삶을 위해 해야 할 일을 꼽아본다.
오는 12월, 배를 내리게 되면 자동차 운전면허부터 따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생활에서 차 한 대 정도는 꼭 필요한 필수품의 맨 앞에 서게 될 것이니, 우리 식구 누구나 운전은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는 것이 바람직한 일임을 눈치채고 있음이다.
집으로 편지를 보낸다.
----당신도 기회를 만들어서 면허 시험을 치루도록 하세요. 내가 배를 내리기 전에 당신이 먼저 따 두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는 군요. 물론 아이들도 모두 따야 하겠지요. 이런 나의 의견을 당신은 어찌 생각하나요?
큰애의 편지 어제 받았습니다. 운전면허를 우리 가족 중에 제일 먼저 취득한 것이니 축하해야겠군요.
막내도 제대하면서 녀석 역시 운전면허 취득을 준비한다는 소식 아울러 들었습니다. 모두가 제 할 일들을 찾아 열심히 생활한다는 이야기이니 흐뭇하군요.
따로 이 큰애에게 편지를 쓰려 다가 그냥 함께 쓰는 겁니다. 지난번 둘째도 바쁜 시간을 쪼개어 편지를 보내왔었는데 역시 개별적인 답장은 못 보냈답니다. 오늘 이 편지를 모두에게 함께 보낸 것으로 여기고 읽도록 하세요.
모레 밤이면 목적항 헤이 포인트(Hay Point)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한 이틀 외항에서 기다렸다가 부두에 댈 것이고 거기서 한 이틀 작업 후, 그 부두와 거의 붙어 있는 다림풀 베이 부두로 접안을 옮긴 후 나머지 짐을 싣고 8월 5일쯤 출항하려는 게 현재의 스케줄입니다.
그럴 경우 8월 20일을 전후한 날짜에 포항에 도착될 거구, 그때쯤 은 이미 한 여름이 다 지나 가을 이야기가 시작될 즈음이 되겠지요.
자! 무더위 속에서 건강을 잃지 않도록 조심들 하시고, 맡은 바 자신의 일에도 충실하며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하며 이 여름을 나도록 합시다.-----
계절을 이야기하든 속에 이미 명퇴에 대한 불안감이 어느새 슬그머니 스며들어 있음에 순간적으로 막막한 심정과 답답한 가슴이 되면서, 둘 곳을 못 찾은 두 손 마저 머뭇거리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