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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Aug 15. 2024

3. 기내 난동 사건

범인은

“어… 어??? 어???!!!!!!”
  


인천공항에서 핀란드의 헬싱키 공항까지 수 시간을 날아왔다*. 이제 1시간 40분 후에 아이슬란드행 비행기로 갈아타야 한다. 착륙 직전, 좌석 위 선반에 둔 배낭을 미리 꺼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시기를 놓쳤고, 착륙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승객들이 일제히 일어서는 바람에 내 배낭이 있는 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탑승할 때 내 자리 바로 위의 선반은 이미 꽉 차서 조금 앞 좌석의 선반에 배낭을 두었었다.



사람들 차례대로 내리면 찾아오지 뭐.



내 자리는 비행기 뒤쪽 끝, 화장실 바로 앞이었고, 결국 모든 승객이 내린 후에야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선반을 보는데……. 없다. 배낭이 없다. 옆 선반에도 없다. 분명 여기 두었는데. 머리가 새하얘졌다.   



“내 가방... 가방이 없어요. My bag is gone!” 나는 한국어와 영어로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이미 기내의 모든 승객이 빠져나간 후였다.



나는 일상적으로 뭔가를 흘리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잦다. 나의 이러한 어설픔을 잘 알고 있는 지인들은 물가에 애를 내놓은 엄마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처음부터 이러다니……




“Excuse me! Excuse me!” 나는 승무원에게 가방을 찾아봐 달라는 부탁을 남긴 채 사람들을 헤치며 미친 듯이 뛰어나갔다. 내 잘못이었다. 기내에 빨리 들어와서 내 자리 바로 위의 선반에 배낭을 넣어뒀어야 했다. 중간에 배낭을 한 번이라도 확인했어야 했다. 나는 자리에 앉은 후 그 많은 시간 동안 배낭에 대해 깡그리 잊었다. 나는 가장 늦게 탑승한 사람 중의 한 명이었고, 앉아 있던 사람들은 내가 내 자리의 선반이 차서 다른 자리에 배낭을 넣는 것을 보았으리라. 내 가방은 다른 가방과 착각할 수가 없다. 의도적이었다. 범인은 그중 한 명일 터였다. 어설픈 동양 여자. 한 번에 봐도 뭔가 가득 담긴 배낭. 기내에 가져올 수 있는 전자기기류, 보조 배터리, 촬영 도구들, 충전기, 심지어 여권과 하나뿐인 신용카드까지. 또 뭐가 있었나…….



왜 남의 가방을 가져가는데! 여기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아이슬란드잖아! 아니구나, 아직 핀란드구나…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이미 저 앞에 가고 있는 승객들을 다급한 시선으로 쫓았다. 그사이 벌써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버렸다. 화장실로 들어간 사람도 여럿. 범인이 화장실에 숨었을까. 남자 화장실에는 가볼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하지. 손에 쥔 스마트폰은 미리 충전해 두지 않아 배터리가 달랑거렸다. 아이슬란드 도서관에서의 발표 일정… 아득해졌다.



미친 듯이 앞으로 뛰고, 돌아서고, 사람들의 가방을 살피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패딩 점퍼 안으로 하염없이 땀이 흘러내렸다.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두려움에 압도된 나는 다시 기내로 뛰어갔다. 제발, 제발, 배낭이 있기를.



그러나 기내로 들어가는 게이트는 잠겨있었다. 유리창 안으로 두세 명의 승무원이 서 있었다. 나는 유리창 문을 두드렸다.



“I lost my bag. I told her to look for my bag.”

내 가방을 잃어버렸어. 다른 승무원에게 가방을 찾아봐달라고 했거든…

“Oh, yeah. It happens a lot.”

아, 그런 일 자주 생겨.



남자 승무원의 아무렇지 않은 반응에 나는 다시 한번 무너졌다.



비행기 입구에는 십여 명의 백인 남녀 승무원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하산할 모양인 듯 했다. “Your bag is here. She will bring…” 그중 한 승무원이 말했다.



왜 그 말이 불쑥 나왔는지 모르겠다.

“My... My son… he told me that I wouldn’t make this trip. And I have to finish it. If I lose my bag from the first place… you know…. I have to make it…”

우리 아들이… 엄마는 이번 여행을 잘 못할 거라고 했거든. 근데 나 해야 해. 처음부터 가방을 잃어버리면… 정말… 나 이번 여행 잘 해야 하거든…

나는 되지도 않는 영어로 승무원들에게 횡설수설 떠들었다.   



가방을 껴안듯 받아 들었다. 고맙다는 말을 연거푸 쏟아내고 뒤돌아 뛰었다. 이제 아이슬란드행 비행기 환승 시간은은 50분도 채 남지 않았다. 가방을 가져다 준 승무원이 무슨 말을 했지만, 나는 뛰어가느라 듣지 못했다. 가방이 어디 있었다고 말하는 걸까?






뒤늦게 합류한 환승 심사대는 끝이 없었다. 유럽 여행객들이 워낙 많았다.



“Late?” 심사대 근처에서 여행객을 돕던 공항 직원이 내게 물었다. 그러면서 탑승권을 보여 달라는 손짓을 했다. 내 탑승권을 본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야, 지금 6시 35분이야. 네 비행기 게이트가 6시 40분에 열려 6시 55분에 닫힌다고 쓰여있잖아, 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 덕분에 빠른 심사대에 설 수 있었지만, 심사대 직원들의 행동은 그저 느긋하기만 했다. 나는 미친 듯이 입술을 물어뜯었다. 핀란드, 증오할 거야!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입국 심사대의 직원은 한층 더 여유로웠다.

며칠 머무를 거니? 집에는 언제 돌아갈 거니?



아이슬란드 행 비행기 출국장은 하필 제일 끝 라인이었다. 미친 듯 뛰었지만, 그 길은 끝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게이트가 보이는데 오싹할 만큼 시야가 한산했다. 한 여자가 나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너, 지금 뛰고 있는 바로 너, 미즈 초혜용 맞지? 아 그런데 이 광경은 너무나도 익숙하다. 그러니까 20년 전 여행 중 환승지인 미국 휴스턴 공항에서 마지막 탑승자를 찾던 방송. 미즈 초혜용! 미즈 초혜용!



털썩. 쓰러지듯 좌석에 주저앉았다. 땀 범벅이 된 점퍼를 벗고 시간을 확인하니 7시 5분. 게이트가 닫힌 지 10분이 지나 있었다. 너그러운 항공사! 평생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백인이었다. 금빛이 아닌 약간 흰빛의 머리카락. 창백한 얼굴. 아, 내가 유럽에 왔구나. 그리고 지금 당신들이 하는 말은 아이슬란드어일 거고? 이제 정말 아이슬란드로 가는 거야!   



지금 자도 얼마 못 자는데. 금방 내릴 건데. 긴장이 풀리면서 급격하게 잠이 몰려왔다. 그러니까... 내 가방을 가져간 사람은 없었던 거네... 그럼 가방은 어디 있었던 거지... 나는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 2024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아이슬란드로 가는 직항은 없으며 핀란드 혹은 영국에서 1회 환승을 해야 한다. 총 비행시간은 환승 시간을 포함하여 약 19시간이다. 기존에는 러시아 영공을 지나는 비행이 가능했기에 14시간 정도가 소요되었으나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시 상황인 현재는 우회하여 지나가야 한다. 


기존에 연재를 완료한 '엄마 혼자 버스 타고 아이슬란드'의 수정 버젼입니다.
다시 읽고, 기억을 되새기며 다듬고 있습니다. 
회차에 따라 지난 연재와 내용이 동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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