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 수상자 한강. 그녀의 책 ≪소년이 온다≫는 충격이었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의 상황을 다룬 그 책을 읽는 내내 몸과 마음이 다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 대단한 책을 나는 치워버렸다. 집안의 어딘가에 두는 것도 마음이 무거워 책을 사지도 않았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미 읽은 책이라는 걸 오늘 아침 줄거리를 확인하고서야 알았고, ≪채식주의자≫는 읽다가 반납했었다. 도서관에 별도로 큐레이팅된 그녀의 영문판 책들을 보고서도 그렇구나 하고 지나쳤었다. 긁적긁적.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유명 소설가의 딸. 아버지와 오빠, 동생까지 모두 문인. 문학평론가인 남편까지 그런 집안이었다. 1995년부터 시작해 굵직한 출판사에서 나온 20여 권의 소설들. 벅찬 마음과 함께 나는 밀린 숙제를 하듯이 그의 책을 읽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 대해 계속 검색해 나갔다. 조금 더 알고 싶었고, 알아야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부 입장에서는 국가 반역자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셈이네!”
한강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남편이 말했다. 그녀의 책은 제주 4.3 사태나 5.18 민주화 운동 등 우리의 아픈 역사를 다루었다. ≪채식주의자≫로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 국제상을 받았을 때 당시의 박근혜 대통령은 한강에게 축전을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소년이 온다≫를 쓴 후에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르며 온갖 지원에서 노골적으로 배제되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폭력의 반대편에 서겠다는 맹세이자 인간 본성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이다."
그녀의 작년 어느 인터뷰 기사 중 그 문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백 년 후에 발표될 책을 쓰고 있는 자
2019년, 그녀는 어느 북토크에서 자신이 앉아있을 무대가 아주 어두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지치고, 슬프고, 그러면서도 겨우 희미한 미소를 담은 얼굴로, 조용하고 느릿하게 그러나 분명히 자신의 이야기를 내놓았다.
“2014년에 어떤 제안을 받았어요. 노르웨이 예술 재단과 협력을 해서 백 년 후에 책을 내는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였어요. 2014년에 500그루의 나무를 심고, 그로부터 백 년 후 그 나무를 다 베어서 책을 만드는 건데, 책을 쓸 작가를 1년에 한 명씩 선정한다고 했어요. 제가 다섯 번째였어요.”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백 년 후에 발표될 책이라… 백 년 후를 어떻게 기약하겠어요? 게다가 그때 과연 종이 책이 있을 지도 알 수 없고요. 유발 하리리는 70년 뒤 현생 인류는 없어질 거라고 했는데요. 그렇게 저는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을 망설이는 제 자신의 모습을 봤어요. 인간의 삶이 얼마나 짧고 좁고 한정적인지 생각하게 되었고요. 앞으로의 세계를 위해서 글을 쓴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그런데 그동안 나는 누굴 위해서 글을 써온 걸까…….”
“저는 그동안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고 생각했던 적이 별로 없었어요. 써야 할 이야기가 있고, 그것만 생각해도 벅차니까. 글을 완성하고 자유의 몸이 되고 싶다, 그런 생각만 했어요. 제 자신은 별로 독자를 생각하지 않는 성향이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의 글쓰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 그러한 인식 말이에요. 그렇다면 그동안 나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할 편지를 열심히 적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한강, 내가 무슨 작가라고
“사실…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글은 안 써진 지 오래였고, 글을 계속 쓸 수 있을지 자신도 없었어요. 2015년 겨울부터 쓰고 있는 책은 2019년인데도 잘 안 됐고, 다시 쓰려고 해도 잘 안 되고, 계속 애를 먹고 있었어요. 그래서 실은 에어비앤비도 예약해 두었어요. 장소를 바꿔보면 나아질까 싶어서… 글과의 불화 시에는 누가 나를 작가라고 부르는 것도 싫었어요. 내가 무슨 작가라고. 나를 작가라고 부를 수 있나? ……
그런데 그 제안을, 백 년 후를 바라보는 그 프로젝트를 고심한 끝에 하겠다고 한 것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인간의 백 년 후를 상상하는 그 자체, 그 내적인 경험, 그 개념 자체의 힘이 있었어요. 그건... 인류를 믿지 않고서는 하지 못하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인류와 함께 종이 책이 살아남아서 백 년 후에 정말로 발표가 되면 좋겠다는 어떤 희망을 갖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그 프로젝트의 가장 큰 수혜자는 다름 아닌 그 100인의 작가가 아닐까 싶어요. 희망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으니까요. 믿어야 하니까. 내일, 인간, 종이 책을 믿어야 하니까…"
몸이 아플 때까지 쓴다
한강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쓰기를 했다고 한다. 한강의 아버지인 소설가 한승원의 증언에 따르면 한강은 어릴 때부터 혼자 책을 읽고 혼자 글을 많이 썼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는 딸의 글을 평가하지 않고 응원만 했다. 유명 소설가인 아버지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몸이 아플 때까지 한 줄 한 줄 심도 있게 글을 써 내려간다. 나는 그저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글을 쓰면서 몸이 아픈 자는 그녀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많은 작가들의, 예술가들의 마음을 짐작해 보았다. 그리고 나의 어쭙잖은 글쓰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목표가 없다고, 쓸 말이 없다고, 시들해졌다고 아무렇지 않게 툴툴거리던 나 자신에 대해서도.
한강 앞에 서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몸이 아픈 것 같다는 생각은 착각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글을 쓰면서 몸이 많이 아팠고, 고통으로 헐떡거렸다. 그녀 자신의 아픔과 그녀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나를 포함한 수많은 독자들에게 미쳤을 것이다. 저 멀리 해외까지도. 한 글자 한 글자 어렵게 새겨나간 그녀의 글을 이제 다시 들여다봐야겠다. 이제야, 그녀의 글을 다시, 제대로 읽을 준비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