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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May 06. 2024

엄마 혼자 아이슬란드 8일 전 - 비상사태

남자 셋은 무방비

입안이 자꾸 말랐다. 입술을 물어뜯었다. 날짜와 시간을 흘깃거렸다. 아이슬란드로 출발 8일 전. 그리고 모든 준비는…



작년 6월. 18일간의 나 홀로 아이슬란드로의 항공권을 질렀을 때의 내 마음은 이랬다.



앞으로 1년의 시간이 남았어. 아주 충분하지. 그동안 나도, 남자 셋도 충분히 준비하는 거야. 자율성을 키울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야.



핑계라면, 일이 무지 많았다. 아니, 늘 많다! 미치도록 바쁘다. 집에서도 뛰어다닌다. 회사일과 끝이 없는 집안일, 아이들 일로 그때그때마다 챙겨야 할 것들. 주말 행사.

<L부인과의 인터뷰> 표지 이미지
L 부인, 집안일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무엇인가요?
- 매일 해야 되는 거요. 그리고 끝이 없다는 거죠.



그 와중에 아이슬란드 도서관에서 한국 그림책을 소개해보겠다고 용감하고 무식하게 제안했다. 한두 권 읽어주려던 계획은 욕심과 애정에 애국심까지 더해져 50권이 넘어버렸다. 모든 출판사들연락해서 대부분의 책을 지원받기까지의 그 과정, 책만 가져가긴 아쉽다며 감히 후원을 받아 마련한 한복, 한지 캘리그래피, 부채에 보자기까지. 뉘신지 모르지만 뜻밖의 일정으로 만나게 될 현지 한인들을 위한 간식거리와 작은 선물들. 독후 활동을 위한 한글 자모음 도장, 워크시트, 각종 스티커. 기타 등등. 기타등등등등등….



복병이 있었다. 그림책의 각 문장에 영어 해석을 달아 붙이는 작업이 그것이었다. 같은 타이틀 중 한 권은 일러스트레이션에 집중하여 감상하시고, 나머지 한 권은 영어 해석을 참고해 보시라는 참으로 기특한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본문의 한국어 텍스트를 모두 타이핑하고, 이를 다시 영어 번역에 알맞은 문장으로 고치고, 이를 chatgpt에 돌리고, 다시 올바른 영어 표현으로 정정하고, 이를 프린트하고, 프린트한 종이를 문장 별로 자르고, 책에 붙이는 고단한 작업에 나는 완전 울상이 되어버렸다. 커터칼로 쓱 자르고 보니 댕강 중간이 잘린 문장들, 붙이고 보니 심각하게 삐뚤빼뚤 인 문장들. 그녀들이 간절했다. 내가 도움을 청하면 바로 달려와 도와줄 철의 여인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 혼자 해야 할 부분이었다. (결국 엄청나게 후회했다.)



그 와중에 대책 없이 아이디어가 추가되었다. 한복에 대한 책도 발표를 할 거니 복돈에 대한 개념을 알려주며 전통 봉투에 신권 천 원씩을 선물로 주면 좋을 것 같았다. 더 예쁜 봉투를 찾아 헤매고 다니고, 40장의 봉투에 천 원씩 담는 작업은 남편을 시켰다.



5월 18일이 발표 일이고, 그로부터 일주일 전부터 현지 도서관에 사전 전시가 계획되어 있었다. 아이슬란드로의 해외 배송에는 2주에서 3주가량이 소요되니, 4월 셋째 주에는 아이슬란드 현지 도서관에 관련 자료들을 택배로 모두 보내놔야 했다.



첫 번째 택배를 4월 말에 간신히 보내고 5월 2일, 간신히 마지막 택배를 부쳤다. 수많은 물건을 택배 박스에 담아 포장하는데 땀이 비오 듯 흘렀다. 1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러 마침내 배송 대금까지 결제를 마친 후 돌아서며 우체국 직원분께 물었다. 점심식사 메뉴는 뭘로 할까요,라고 묻듯 자연스럽게 툭.



“그런데 제가 천 원짜리 40장을 봉투봉투에 담았는데 상관없겠죠?”



현금성은 천 원짜리 상품권 하나도 공항 탐색대에서 스캔되어 반송된다고 했다. 봉투 40개를 어느 박스에 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결국 두 박스를 다 뜯고 돈을 빼고 다시 포장했다. 난 뭐 수 백 만불 돼야 걸리는 줄 알았지. 영화 보면 그렇잖아요. ㅡ 오 주여.



원래 계획은 전시될 50여 권의 책 중 실제 현장에서 낭독하고 소개할 두세 권의 책에 대한 프레젠테이션 연습을 한 달 전부터는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에 앞서 지난 1년간 영어 공부를 해두려고 했다. 이제 모든 것은 과거형이다. ‘그랬었었어야 했는데.’




막판까지 발표할 책의 타이틀을 결정하지 못했다. 번복하고 또 번복했다. 좋은 책은 너무 많은데 실제 입말로 맛깔스럽게 표현될 수 있을 책,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반응이 좋을 책을 찾다 보니 자꾸 책만 검색하고 있었다. 이미 책은 택배로 다 보낸 후인데 결국 리스트에도 없던 책 두 권을 선정했다.




출발 10일 전. 평소에 잘 이용하지 않는 옆 동네 도서관에 들렀다. 헉! 유아실의 입구에서 나는 얼어붙었다. 입구에 진열된 책을 조용히 꺼내어 온몸으로 껴안고 데스크 사서분께 다가가 나직이 물었다.

“빅북도 대출이 되나요?”


≪장수탕 선녀님≫의 빅북은 가로 36, 세로 50 센티미터. 무게도 상당했다.


현지 도서관 행사가 끝나면 이후 10여 일 간 난생처음 배낭여행을 해볼 예정이었다. 운전을 못하는 나는 캐리어 없이 배낭 하나의 짐으로 18일을 버텨야 했다. 조그마한 배낭에 그 책이 들어갈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줄줄이 꿴 호랑이≫와 ≪수박 수영장≫ 빅북도 보였다. 역시 품에 안았다. 검색해 보니 우리 시의 시립도서관에서 이곳에만 있는 빅북들이었다. 이건 운명이야. 데스티니라고…

빅북


출발 10일 전. 바빠 죽겠지만 지인이 추천해 준 영화 ‘Wild(와일드)’를 보았다. 일상의 모든 희망을 잃은 여성이 수십 일간의 극한 트레킹을 홀로 완성해 가는 실존 영화이다. 중간중간 눈물을 쏟으며 영화에 몰입했다. 엔딩크레디트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도 트레킹을 해볼 건데 어떻게 하는 거지?


레이캬비크(아이슬란드 수도) 시내에 가면 트레킹 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건가? 그럼 그 무리에 합류하면 되는 건가? 깃발이라도 있는 건가? 자 출발합니다, 하면 옹기종기 따라가면 되는 건가? 걷다가 힘들면 다시 돌아와서 시내에서 숙소 잡으면 되는 건가? 아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지? 동서남북은 어떻게 구분하지? 이거 거의 걷다 보면 록키산맥이 나오겠지, 이런 심보인데? 레이캬비크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만 걸어보지 뭐. Chatgpt에게 물었다.



레이캬비크에서 도보로 가장 가까운 도시가 어디야? 걸어서 얼마나 걸려?


'레이캬비크에서 남쪽으로 가장 가까운 도시 ****(까먹음)은 약 22km로 도보로 6시간이 소요됩니다.'



흠… 운전을 못하는 나는 22km에 대한 감이 없었다. 도보로 6시간이라 함은…. 할만한 건가? 만일 혼자 가다가 6시간 만에 도착 못하고 밤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불현듯 아직 짐 쌀 목록을 정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텐트를 사야 할까 고민을 하다가 텐트를 쳐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포기했다. 잠시 트레킹에 대한 검색을 중지하고 쿠팡앱을 열었다.



아이슬란드의 물가는 대략 우리나라의 10배. 출발 9일 전, 쿠팡의 새벽배송에 무한 감사인사를 전하며 생각나는 대로 주문했다. 양말 15켤레. 속옷 15장. 군용 식량 6개. 참치캔. 햇반 작은 것. 우비. 방수장갑. 수영복. 뭐가 좀 많이 빠진 것 같은데 뭐가 빠지고 뭐가 안 빠졌는지 모르겠다.






도서관 행사에 온 신경이 쏠려 가서 도보와 대중교통으로 어디를 다닐지 짜놓지 못했다. 그제야 검색에 들어갔다.



'아이슬란드는 대중교통으로 여행이 불가한 수준이며, 패키지 프로그램은 무척 비싸다. '



Booking.com에 접속했다. 레이캬비크 인기 패키지여행 1위를 예약했다. 레이캬비크에서 출발하여 8시간 동안 버스로 3군데의 랜드마크를 살펴보는 당일코스였다. 금액은 9만 원대. 훌륭했다. 수백 만원짜리 여행 패키지도 많았지만 일단 하나라도 예약한 스스로에 흡족해했다. 일단 여행은 이거면 됐어.





오늘이 5월 6일. 두 번째 택배를 보낸 게 겨우 사흘 전이였다. 2주가 소요된다면 행사일인 18일에 하루 이틀 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거지만 3주가 소요된다면 망하는 거였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국제택배 배송현황을 조회했다. 첫 번째 택배를 보낸 지 11일, 아이슬란드 내에 물품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두 번째 택배는 4일째 프랑스에 머물러 있다. 제발!!!






세탁, 요리, 청소 및 각자의 스케줄에 대한 엄마 의존도가 백 퍼센트인 두 아들과 남편. 나는 내가 없는 18일 동안 어떻게 지낼지 아직 이들을 훈련시키지 못했다. 출발 9일 전. 나는 그제야 네 가지 아이템을 주문했다.



1. 캡슐 세탁 세제

- 하나씩 넣으면 되니까 편하잖아. 조정석도 하잖아.



2. 3단 분리수거함

- 인간이면 분리수거하겠지?  



3. 음식물 쓰레기통

- 봉지가 아니라 쓰레기통이면 남자들도 가져다 버리겠지?



4. 4단 빨래 바구니

- 건조기에서 세탁된 옷을 꺼낸다. 각자의 옷을 빨래 바구니에 분리한다. 입고 싶을 때 입는다. (개지 않을 거니까)






마음 같아서는 가기 전에 집안을 싹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냉장고 청소를 하다가 비행기를 놓칠 판이었다.


'여성들이여, 나 홀로 여행을 시도하라…!' 내가 대중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였다.


개뿔. 누가 누구에게 조언을. 나는 절실하게 깨달았다. 일상의 컨베이어 벨트가 잘 돌아가게 각자도생 연습을 시켜뒀어야 했다는 것을.




멍해졌다. 출발 일이 되어서야 옆 동네 마실 가듯 부랴부랴 가방을 싸고 도망치듯 집에서 뛰쳐나오겠구나. 결국 또 그렇게 되겠구나.



고백한다. 이 와중에 스마트폰의 잠금 패턴을 잊어버려 24시간마다 한 번씩 패턴 풀기를 시도할 수 있다. 지금까지 5일째. 내일은 출발 7일 전. 폰 초기화를 시켜야 할까? 유심도 사야 되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간다.


양쪽 부모님께 절대 의존하지 않겠다고 여행 계획은 알리지 않았다. 똑-딱-똑-딱.


3주간의 여행 기간 동안의 회사 일은 다 해 놓고 가기로 했다. 내일부터 해야 된다. 8일 전이다. 똑-딱-똑-딱.


그리고 또 뭐가 빠졌더라…?


똑-딱-똑-딱-똑-딱-똑-딱.


.

.

.

.

.

.

하는 데까지 하자. 어떻게든 출발만 하자. 이것이 현실판 엄마의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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