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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Jun 06. 2024

3. 동산에 서서 함성을 듣다

여성이 멈추면 세상에 바뀐다

아이슬란드 도착 첫날, 저녁 여섯 시부터 죽은 듯이 잤다. 원래 불면증이 좀 있는데 6인실에 나 외에 몇 명이 더 들어온 지도 모르고 기절해 버렸다. 다음 날 새벽 세 시에 깼지만 혼자 바스락거릴 수가 없어서 다시 잠들고 깨기를 반복하다가 새벽 여섯 시가 넘어 살금살금 나왔다. 아이슬란드는 지금 여름 시즌 직전이라 백야현상으로 밤에도 해가 지지 않는다.



유일하게 가져온 신용카드가 없어져서 편의점에서 배낭을 다 뒤집고 한바탕 난리를 쳤다. 아니 왜 우비 사이에 있는데?



이른 아침, 도심의 상가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발이 가는 데로 움직이며 문 닫힌 상가의 간판이나 윈도우를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본다. 발길이 가는 대로 움직여도 도시가 크지 않아 멀리 벗어날 리 없고, 구석구석이 안전하며, 모든 아이슬란드어와 영어가 병행 표시되어 있어 편리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른 아침 낯선 나라의 빈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그 시간, 마음이 잔잔하게 충만해진다. 아, 내가 진짜 여기에 왔구나.






서점이다! 한눈에 봐도 꽤나 역사가 있어 보이는 서점이다. 유리창 안을 기웃거리며 그 안쪽의 풍경을 상상해 본다. 입구 문에 게시된 서점 오픈 시간을 보다가 문 앞에 붙어 있는 어떤 글귀에 사로 잡힌다.


"이런 종류의 서점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 감히 정의해 보겠습니다. 유머와 학식, 호기심을 가진 자에 의해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는 책 형태로 된 것은 무엇이든 낯설어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서점은 겉으로 보기에 영원히 혼란스러운 상태로 유지되어야 하는데, 항상 선반 공간보다 너무 많은 책이 있고, 검토가 필요한 새로 구입한 책들이 언제나 쌓여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서점은 다양한 책들을 제공해야 하는데, 그것의 주된 기능이 작가들이 자신의 취향을 깨닫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구를 쓴 John Fowles에 대해 찾아보았다. 1960년대부터 활동해 온 영국 작가이다. 내용을 세세하게 이해 하긴 어려웠지만 너무 멋진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서점이란 곳이, 그리고 서점지기란 존재가 신비롭고 매력 넘치는 입체적인 존재로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인생의 목표는 당신의 심장 박동을 우주의 리듬과 일치시키고, 당신의 본성을 자연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글은 심지어 이발소의 윈도우에 프린트되어 있었다. 오 마이 갓. 이발소에!





지나가다 본 벽. 화살표 표기와 함께 바로 옆의 음식점에 대한 글이 붙어 있었다.

"당신에게는 몇 걸음 더일 뿐이지만, 당신의 미각에는 거대한 도약입니다."



한국어로 해석을 하면 조금 낯간지럽지만 굉장히 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아이슬란드는 전 세계 독서 인구 1위로, 전 세계에서 국민 당 작가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이며, 스토리텔링을 사랑하는 나라이다.



이러한 문구는 언제나 내 시선을 사로잡고 나는 그 앞에서 쉬이 떠나지를 못한다. 때로는 문구를 붙여놓은 이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이러려고 아이슬란드에 왔나 보다. 이런 작고 빛나는 것들을 위해. 맞다, 나는 그래서 왔다.






숙소에서 걸어 2분 거리의 동산에 올라가 본다. 중앙의 벤치에 앉아 내려다보니 다운타운 전체가 시야에 잡힌다. 여기가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도 딱 중심부이다. 평일 아침 8시가 넘은 시간. 신경질적이고 때로는 전투적일 수도 있을 출근길 차량들의 바쁜 모습은 전혀 볼 수가 없다. 사실 차가 별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에게는 가장 바쁜 시간이겠지? 아이슬란드의 국토 면적은 대한민국과 비슷하고 총인구는 38만 명에 못 미쳐 우리나라의 100분의 1도 안 된다. 우리나라 동작구 정도의 인구수라고 한다.



문득 아이슬란드 여성들이 성평등을 위해 총파업을 했었다는 장소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곳을 포함한 이 근방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성이 멈추면, 세상이 바뀐다.”

“여성을 바꾸지 말고, 세상을 바꿔라.”



1975년 10월 24일, 금요일의 단체 월차. 그날 아이슬란드 여성들은 성별 임금격차에 항의하기 위한 월차 투쟁을 벌였다. 가사 노동을 포함하여 모든 일을 손에서 놓았다. 아이슬란드 여성의 90 퍼센트가 참여한 이 엄청난 일로 당시 사회 전체가 마비되었다. 사실 그때까지는 우리나라와 아이슬란드의 성평등 차별 정도가 비슷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아이슬란드는 변화했고, 1980년에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가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4선을 거치며 16년 동안 대통령 직을 수행했고, 5선에 도전하지 않기로 결정하며 대통령직을 마무리 지을 때 지지도는 90 퍼센트가 훌쩍 넘어 있었다. 90세가 넘는 살아있는 전설인 그녀는 여전히 아이슬란드에서 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젊은 시절의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


세계 성평등 1위 국가. 그러나 ‘완전한 평등’을 위해 꾸준히 총파업을 벌이고 있는 여성들. 그리고 바로 그 장소에 내가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소름이 쫙 돋았다. 마치 그들의 함성이 땅에서부터 웅웅 거리는 듯했다. 그렇게 어떠한 단호하고 담대한 기운이 공원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더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가만히 벤치에 머물렀다.





언덕에서 내려와 남편과 카톡을 했다. 큰 아이는 또 학교를 결석했고, 축구선수인 작은 아이는 그 사이에 발목 인대를 다쳐 부목을 하고 집에서 신나게 티비를 보고 있다고 한다. 너무 똑같은 일상이잖아. 뭐 당연한 거지만.



여기에서도 나는 아이들 관련해서 체크하고 학교 등과 소통을 하고 있다. 남편도 하고 있지만 간간히 나도 챙길 수밖에 없다. 원래는 아예 남편에게 맡기고 여기에서만은 온전히 나이고 싶었다. 그러나 철저하게 끊어내지 못했다고 아쉽거나 분한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대부분의 나를 나 스스로만을 위해 쓰고 있는데 나머지 5퍼센트를 쓰는 게 무슨 대수랴. 벌써부터 마음이 한없이 관대해졌다.



잠시 후에는 다시 짐을 정리하고, 은행을 가고, 박물관을 돌아볼 것이다. 여기에 왔다고 그저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머릿속이 폭주하는 기관 열차처럼, 혹은 프로펠러처럼 날카롭게 돌고 있지 않다는 것, 한 번에 하나만 하고 있다는 것, 그렇게 내 안에 틈이 있다는 인식이 나를 너무나도 평온하게 했다.



숙소로 돌아오는데 날씨가 심상치 않더니 금세 하늘이 어두워지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척박한 지형과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로 유명한 아이슬란드. 이제 시작인 건가? 서둘러 고어텍스 점퍼의 후드모자를 눌러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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