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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Jun 11. 2024

5. 아이슬란드 대학교에는 아무것도 없다

있는 것과 없는 것

이틀 후 있을 레이캬비크 내 게르드베르크 시립도서관(Menningarhús Gerðubergi)에서의 한국 그림책 발표를 앞두고 도서관 사서인 릴랴와 만날 생각에 가슴 두근거려하던 것도 잠시, 미술관에 정신이 팔려 시간을 지체하고 말았다. 너의 근무 시간이 끝날 즈음 도서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야심 차게 얘기했지만 낯선 외국 땅에서의 초행길에 늦고 만 것이다. 허둥지둥 버스 정류장에 서서 그제야 버스앱을 설치하는데 어? 왜 안 되지? 앱 설치하고 금액 충전하면 된다고 했는데. 자꾸만 설치 오류 메시지가 뜬다. 당황해하며 재차 시도하고 있는 사이 타야 할 버스가 서고 또 무심히 가버린다. 안돼! 다음 버스는 40분 후에나 온다. 망한건가. 나중에 릴랴 왈, 그 버스앱이 엉터리라고.



도서관 운영 시간이 종료되기 전 도서관 내부도 살펴보고 발표 전 마음의 준비도 해야지 싶었는데 버스도 타지 못했다. 어떻게 다음 버스를 탄다고 쳐도 도서관 운영시간이 지나 버려 내부를 볼 수 없다. 수도 레이캬비크의 시내버스는 모바일로 현금을 충전하는 방식과 실제 현금을 내는 두 경우가 가능한데 내게는 현금도 없다. 한국에서는 아이슬란드 화폐인 크로나를 직접 구매할 수가 없다. 유로화로 바꾼 후 아이슬란드에 와서 크로나로 바꿔야 한다. 그제야 은행의 위치를 검색해 본다.



오고 있어?

카톡 하는 아이슬란드 여자.


아니… 버스 카드 충전이 안돼. 버스가 갔어.


괜찮아. 내일 보면 돼. 걱정하지 마. 지금 어디야?


그냥 길에 서 있어…


내일 숙소 근처로 데리러 갈게.



나는 나보다 한참 어린 그녀에게 나의 어리바리함을 간파당한 것이 민망하면서도 동시에 픽업 온다는 말에 안도했다. 자 그럼 오늘의 목표는 은행 찾기이다. 구글맵에서 은행 위치는 찾았는데… 엇, 영업종료? 하긴 한국도 은행 영업시간이 짧다. 그럼 은행 가는 건 내일의 미션으로 미뤄야겠군.






릴랴와의 오늘 일정이 끝난 김에(?) 이제 뭘 할까 지도를 보다가 아이슬란드 대학교에 가보기로 한다. 걸어서 30분, 학교는 도심 중앙에서 벗어나 있다. 레이캬비크는 시내만 벗어나도 갑자기 고속도로 분위기가 난다. 왜 아이슬란드 대학교를 가냐고 하면… 그냥 지도를 보다가 생각이 나서. 레이캬비크에 오면 가야 할 곳, 이런 리스트에 있는 곳은 아니다.



출발 때부터 하늘이 어둡더니 빗방울이 거세진다. 아이슬란드에서는 7분만 기다리면 날씨가 바뀐다더니 뻥인 것 같다. 20분을 넘게 걸었는데 빗줄기가 약해지지 않는다. 아이슬란드에서는 바람이 강해 우산을 써도 소용없다더니, 그래서 우산 쓴 사람이 없고 우비가 필수라더니, 우산 쓴 사람도 몇은 있고 바람은 전혀 불지 않고 있다. 이런 날씨에는 그냥 우산 쓰면 되는 건데… 작은 우산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다. 비가 와도 우산을 쓰는 것은 관광객뿐이라 누가 관광객인지 식별하기 쉽다는데 어차피 나는 누가 봐도 관광객이다.   



그래도 언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비를 맞아보나 싶어서 꿋꿋하게 걸어간다. 빗줄기가 약하지 않은데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다. 발걸음이 빨라지지 않는다. 비가 오면 오는 데로 맞는다…  막상 누구나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하다. 뭐든지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푸념하지 않는 것. 심지어 이 와중에 웃통을 벗고 조깅하는 남자도 둘. 그런 모습이 왠지 반가워 씩 웃음이 나온다. 나 또한 재킷의 후드모자를 당겨 쓰고 가던 길을 계속 간다.





다운타운 끝에 있는 티외르닌(Tjörnin) 호수를 끼고 산책로를 따라 걸어간다. 호수의 오리들은 비가 익숙하다 못해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호수가 있는 공원을 한참을 걸어가니 저 멀리 대학교가 보인다. 고속도로의 시작점 같은 곳에 그냥 있다. 전혀 특별하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나라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인구 38만, 전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낮은 이 나라의 그 어떤 곳에서도 스케일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그건 그냥 전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에서 나고 자라온 내 입장에서 생각하는 고정관념일 뿐이다.



나는 뭐를 기대했던 걸까. 아마도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수도에 있는 제1의 국립대학교가 그저 평범한 시설 중 하나라는 것, 위압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 자체로 어떤 고귀한 가치나 대단한 성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을 직접 보고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먼 나라에 와서, 내가 꿈꿔온 이 나라에 와서 그렇게 안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학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위에, 중심에 위치한 많은 것들에 대하여.






크지 않는 학교다. 금세 둘러볼 수 있을 것 같다. 내부를 기웃거려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접었다.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오고 가는 사람도 별로 없이 한산한 분위기이다.



교내 건물 구조도가 있다. 전공 과명과 이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기재되어 있어 살펴본다.



School of Humanity (인문학 학교),

The Icelandic Study (아이슬란드어 연구)

Continuing Education (지속적인 교육),

Center for Small State Studies (작은 나라 연구 센터)

The Gender Equality Education (양성 평등 교육)

Equal Opportunity (기회 평등)

Center for Women’s and Gender Studies (여성과 성 연구 센터)

Institution for Sustainable Development (지속 가능한 개발 기관)



와우. 몇몇 과가 아니라 상당히 많은 영역이 위와 같은 범주에 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타이틀명만 봐도 그들이 체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고 있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지를 엿볼 수 있다. 문득 우리나라 대학의 요즘 전공과 이름도 알고 싶어졌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과연 달라졌을까.



빗줄기가 거세다. 비를 맞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안경은 빗방울로 계속 얼룩지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조금 쌀쌀해진 것 같다. 돌아갈 길도 멀다. 걷는다. 그냥 묵묵히 걷는다. 발걸음이 조금 씩씩해진 것 같다. 가벼워진 것 같다. 어둑어둑한 하늘을 보며 근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었던 몇 시간 전과 달리 머릿속이 맑아졌다. 왠지 앞으로도 이곳에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고속도로까지(실제로는 고속도로는 아니지만) 대학교를 찾아 걸어왔던 이 길을, 빗속에 그 길을 걸으며 떠올렸던 생각들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운타운에 다 왔는데 갑자기 날이 개며 배시시 해가 뜬다. 10여분을 더 걸으면 바다가 나온다. 다운타운의 끝까지 걸어가 그 바다를 바라보는데 슬며시 무지개가 올라온다. 멍하니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자니 곧 무지개를 발견한 다른 관광객들이 호들갑을 떨며 사진을 찍어댄다. 그제야 나도 스마트폰을 꺼내 든다. 남편과 같이 왔으면 좋았을 걸. 가장 먼저 남편 생각이 나는 걸 보니 아직 사랑이 식지 않았나 보네. 픽 웃음이 나온다.  



“비를 쫄딱 맞고 대학교까지 걸어갔다 왔다고?” 

비에 젖은 우중충한 내 모습에 같은 룸을 쓰는 미국인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하다. 나는 그냥 씩 웃고 만다. 앞으로도 왠지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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