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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Jun 09. 2024

4. 미술 문외한, 아이슬란드 미술관에서 오열하다

미술관에 대해서 글 쓸 날이 올 줄이야

출발 전, 나는 아이슬란드에서만큼은 절대 조급하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여행 내내 수도 레이캬비크에서만 머물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항에 물고기 한 마리를 조심스레 넣어주듯 그곳에 나 자신을 가만히 놔둬 보겠다, 그리고 그곳에서 과연 내가 흐물거려질지, 그러다 결국 해체될지, 혹은 또렷해질지, 아니면 똑같을지 스스로를 조용히 따라가 보겠다,라고 생각했다. 18일은 내 안의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나기에 터 없이 적은 시간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여행이라는 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적절한지 아닌지에 대한 생각마저도 나는 치워두었다.






숙소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박물관에 갔다. 어디나 그렇듯 관광객들이 이곳 레이캬비크에 오면 방문해야 할 장소 리스트가 있지만 일단은 발길이 닿는 곳을 가보기로 한다. 평소 박물관을 즐겨 찾는 스타일은 절대 아니다. 학창 시절 역사는 지겨운 암기 과목이었고 이후 나의 관심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정확하게는 마흔 중반이 가까워서야 역사에 조금씩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장구한 세월의 때가 뭍은 그 안에 뭔가 어마어마한 비밀이 있을 것 같은 막연한 확신 그러한 상상만으로도 숨을 죽이곤 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고 역사라는 카테고리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생각을 하진 않았다.






The House of Collection. 구글에는 박물관이라고 되어 있지만 ‘Collection’이라는 표현 그대로 다양한 아이슬란드 작가들의 작품들이 큐레이팅되어 있는 지금은 미술관이 된 옛 건물. 하얀색의 건물 외관이 고풍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박물관용으로 별도로 지은 건물이 아닌 만큼 내부는 아담하다. 1층에는 안내 데스크와 카페, 미술관에서 판매하는 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아직 이곳의 특징을 짐작해 볼 수 없다. 데스크 직원으로부터 지하 1층에 아우터를 걸어놓을 수 있는 장소가 있고, 4층에서부터 내려오면서 관람하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계단을 내려가본다. 이 미술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전시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아직 아무런 정보도 없다.



1층과 달리 빛이 제거된 지하에 들어서니 몸도 마음도 멈칫한다. 이 건물 밖이 바로 도로이고 수도 레이캬비크의 도심 한복판이라는 것은 이미 기억에서 완전히 잊혔다. 작은 공간이긴 하지만 나 혼자밖에 없다는 사실만이 강하게 의식되며 비밀스러운 공간에 들어선 듯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점퍼를 행거에 걸어 두고 왼쪽 룸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룸 안은 복도보다 훨씬 더 어둡고 벽면을 따라 작은 그림들이 띄엄띄엄 전시되어 있다. 주로 1800년대 중 후반부터 1900년대 중반부에 제작된 이 작품들은 제작시기와 아티스트명, 그리고 작품 제목 외에 아무런 설명이 달려있지 않다. 관리가 안 되고 있는 공간인지 의도적인 자연스러움인지 조금 헷갈린다. 그러나 그림의 소재가 마법과 마녀에 대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고, 낯설고 이국적인 그림들과 그 어떠한 소리도 배제된 지하의 어두운 공간이 자아내는 비밀스럽고 기묘한 분위기가 강렬하다. 이 그림에서 저 그림으로 시선을 옮겨갈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며 “What’s this?”라고 골룸스러운 말투로 속삭이게 된다.



아이슬란드 사가(Saga)는 중세 아이슬란드의 문학 장르인데, 당시의 역사, 전설, 신화 등을 다루는 역사와 허구가 혼합된 무용담이다. 1년 중 많은 날이 햇볕이 제거된 어둠의 나라. 그곳에 사는 아이슬란드 인들은 할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로, 다시 그 자녀에게로 구전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그렇게 스토리텔링을 사랑하는 나라가 되었다.



“Look into my glowing eye, Gunna!”

내 눈부신 눈을 쳐다봐, Gunna!



내 눈을 보라는 마녀의 말은 매혹적이지만 그녀의 눈을 쳐다본 순간 파괴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임은 자명하다. 내가 그림 속 장면으로 들어가든 그림 속 마녀가 밖으로 나오든 한순간 둘 중 하나의 상황이 벌어질 것만 같은 무서운 기분에 사로잡히지만 고양이 앞에 다리가 마비된 쥐처럼 시선이 그림에 붙들려 옴짝 달짝할 수가 없다. 어둠이 두렵지만 이미 어둠 속으로 들어와 버렸고, 더 큰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Fly away, Magic Cloth”
 날아가라, 마법의 천아

문장 형으로 된 제목은 그림에 담긴 스토리 자체를 보여주어 보는 이의 흥미를 유발한다.







뒷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떨치며 지하 1층에서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도 뭔가 마법적인 요소가 있는 것만 같다.



4층은 지하와는 완전 다른 분위기이다. 그제야 엘리베이터 옆에 붙은 층별 안내도를 살펴본다. 4층은 공기(Air), 3층은 땅(Land), 2.5층은 심장(The heart), 2층은 바다(Ocean)라는 각각의 주제별로 다양한 아이슬란드 작가들의 작품이 영상물, 사진, 그림 등 다양한 형태로 전시되어 있다. 지하 1층이 뭔가 기묘한 분위기였다면 4층은 목재 소재 옛날 집의 실내 공간 중간중간에 예술 작품을 자연스럽게 배치하여 온화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긴다. 그러고 보니 4층에도 인기척은 없고 정적만이 감돈다. 완벽한 고요 속에 오직 나와 이 작품들뿐이다. 빙하의 과거와 현재의 극명한 변화를 담은 영상은 설명은커녕 소리도 제거되어 있지만 그럼으로써 더욱 영상에 집중하게 되고 충격은 배가 된다.



빛의 방향에 따라 달리 보이는 거울 속 나를 보면서 생각해 본다. 나의 진짜 색은 뭘까. 색이 바뀌고 있을까, 바뀌고 있다면 바뀌는 걸 스스로 알아채고 있나, 혹은 진짜 내 모습은 늘 같았을까. 사진을 찍으면 내 모습을 명확하게 알 수 있기라도 한 마냥 연거푸 카메라 셔터를 눌러본다. 그리고 거울 속 내 모습을 보고 또 본다.



미술관에 들어설 때는 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지하 1층과 4층의 분위기가 어우러져 뭔가 초자연적이고 마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3층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전시실을 관람할 때는 창문에서 실내로 온전히 와닿는 햇살이 너무나도 청량하여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되어 버린다. 그 햇살에 심지어 화장실도 사랑스럽다.








관람을 마친 후 1층의 출구 문을 열고 밖을 나오는데 강렬한 햇살과 함께 순간 어안이 벙벙해진다. 한 편의 압축된 영화에 몰입했다가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으로 나왔을 때 마주친 현실의 풍경에 머쓱해지는 것처럼 괜스레 뒤통수를 긁적긁적.     



무안한 마음이 들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몇 분 전 대성통곡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술에 문외한인 나는 왜인지 그 그림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그림의 제목을 확인한 순간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균형.’



막대기 위에서 위태롭게 바퀴가 돌고 있다. 앞서 돌아가는 노란색 바퀴가 마치 줄타기 곡예를 하는 사람처럼 아슬아슬해 보인다. 그리고 노란색 바퀴 뒤에 두 번째 바퀴는 크기가 다른 바퀴 넷이 연결되어 있다. 왠지 앞서 가는 노란 바퀴는 조금 늙어 보이기도, 연약해 보이기도 한다. 다시 보니 이번에는 온화하고 강인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노란색이지만 자신의 몸에 언제라도 다른 색을 입혀 색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색 같아 보이기도 한다. 혹시 노란색 바퀴는 엄마, 그리고 하나로 엮여있는 나머지 바퀴들은 아이들일까. 그런 생각과 함께 갑자기 엄마로서의 내 자아가 바닥 끝에서부터 끌어올려졌다. 엄마라는 자아와 엄마의 역할이 아닌 본연의 내 자아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것, 나와 아이들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것. 그림을 보는데 그 바퀴들이 한없이 안쓰럽고 대견해 보였다. 동시에 동그라미를 지탱하고 있는 곧게 뻗은 막대기에 눈길이 갔다. 막대기는 견고해 보였고 아래위로 그림자처럼 그어져 있는 얇은 막대기들은 일종의 안정망 같아 보였다. 동그라미는 계속 굴러갈 거야. 서로의 속도를 맞추어 가면서. 너무 빨리 가서 부딪히지도 않을 거고, 그렇게 조심조심 한 걸음씩 나아갈 거야. 그러면서도 균형감을 잃지 않아. 봐봐, 막대기가 지탱해주고 있잖아. 그러니 걱정 마.   





원 창작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전혀 모른다. 개똥 같은 자의적 해석에 취해 나는 한참을 흑흑 거리며 울었다. 울고 있는 내 모습이 서러워 또 울었다.  



문을 닫고 나오니 미술관은 그 하얗고 말간 모습 그대로 모르는 척 서 있다. 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또다시 마법의 순간이 열릴까.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난생처음 느낀 그 강렬한 인상과 몰입감은 도대체 뭐였을까. 아이슬란드여서? 나 혼자여서? 때마침 그곳에 아무도 없었고, 때마침 날씨의 변화가 기가 막혔고, 이에 부응하듯 내 안의 작은 감각들이 되살아난 건지도 모르겠다. 다른 날, 다른 시간에 그곳을 방문했을 때 같은 느낌을 가지리라고 확신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었던 지간에 그 순간에 내가 푹 빠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예술이라는 것은 어떤 작품과 그것을 바라보는 이 사이의 온전히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상호작용, 그뿐이지 않을까. 그러한 상호작용이 잘 만들어질 수 있도록 다음에도 나 홀로 미술관을 탐방할 수 있는 황금 시간대를 노려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 공간을 빠져나왔다.



마법과도 같은 순간이 깨질까 봐 조심조심 뒷걸음질을 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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