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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시간 Jul 16. 2022

받는 게 불편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누군가가 다가오면 부담스러웠지만 거절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주는 호의가 선물이, 관심이 항상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1의 양만큼 호의를 받았으면 기억해두었다가 1의 양만큼 주었고 내가 하는 깔끔한 계산법에 만족했다. 친구를 만날 때에는 더치페이가 좋았고 생일에 기프티콘이라도 받았으면 상대방의 생일을 수첩에 기록해 두고 그 금액만큼 챙겼다. 남자 친구와 데이트할 때도 남자 친구가 밥을 샀으면 다음번에 내가 밥을 사서 균형을 맞추었다. 모든 관계에서 더 받는 것도 싫었고 덜 받는 것도 싫었다. 반대로 더 주는 것도 덜 주는 것도 싫었다.


왜 이렇게 나는 기브 앤 테이크, 테이크 앤 기브를 확실하게 했던 걸까? 거절하지 못하고, 내 한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의 요구가 내키지 않아도 거절하는 방법을 몰랐다. 거절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거절한 다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또 내 한계선이 어디까지 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이혼 전에는 지금보다는 경제적으로 풍족했기에 상대가 준 것에 내 마음을 얹어 더 줄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고 언제까지나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전남편이 아이를 봐줄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의 요구나 관심에 응해줄 시간적 여유도 있었다. 이렇게 한없이 나는 더 줄 수 있는 위치, 받은 만큼은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을 줄 알았는데 살다 보니 그렇지 못한 상황에 도달했다.


그러다 생일날 오는 기프티콘들 중 몇 개는 고마운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때부터 여태 해오던 방식이 나를 더 불편하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혼, 이사 등 갑작스러운 변화가 몰아친 지금은 생활비 만원, 이만 원을 계산해서 생활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내가 받은 만큼 줄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다. 생각을 바꾸어야겠다는 결심보다 바꾸지 않으면 내 마음이 계속 불편한 상태로 남아 있기에 바꿀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꼭 받은 만큼 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내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반찬, 아이 선물 등을 해주며 나를 위로했을 때 받는 기쁨 보다도 이만큼을 또 어떻게 돌려줄 수 있을지 고민이 먼저 시작되었는데 이 연결을 끊었다. "그래 받을 수도 있지. 살다 보면 그냥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 줄만큼의 사정이 되니까 도움을 주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받는 게 익숙해지자 내가 주는 것도 편해졌다. 전에는 내가 먼저 주면 상대방도 나에게 빚이 생겼다는 기분이 들까 먼저 마음이나 호의를 베풀지 못했는데 그 사람이 나에게 꼭 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괜찮아졌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만 주지 않고 내가 타인에게 타인이 또 타인에게 주면서 화살표가 계속 이어지며 선순환이 이루어져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조금 가벼워진 태도로 다시 세상과 소통하니 관계도 편해졌다. 어떤 틀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만 생활하려 했던 전과는 달리 이런 경우도 있고 저런 경우도 있다는 것을 거북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지금은 오히려 이혼 전보다 이웃과, 아이 친구 엄마와, 직장동료와 활발하게 교류하며 편하게 지낸다. 이런 건 이혼의 긍정적인 점이라고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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