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머리 제이슨 Jun 29. 2023

미래1공원의 덩크슛

서귀포 신시가지는 조금 독특한 동네다. 일단 월드컵 경기장이 있는 곳이며, 각종 행정 청사들과 연수 교육원이 밀집되어 있다. 말하자면 계획도시 비슷한 것이다. 공무원도 많이 살고, 외지에서 온 사람도 많다. 


서귀포 경찰서와 시청 2 청사는 커다란 삼각형 도로로 둘러 쌓여 있다. 그 아래로 두 방향의 큰 도로가 나 있는데, 그래서 지도로 보면 커다란 오징어 외계인이 웨이브 댄스를 추고 있는 것 같다. 오징어 외계인의 머리 위로는, 중산간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주택가가 자리 잡고 있다. 계단 형태로 배치되어 바다를 내다보는 주택들이다. 


주택단지는 북쪽 중산간 도로를 향하는 큰길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뉘어 있다. 동쪽 단지와 서쪽 단지는 각각 도로 하나를 끼고 남북으로 분할되어 있다. 그렇게 4분면으로 나뉜 동네마다 중심에 조그만 공원을 끼고 있다. 동북쪽에 위치한 공원의 이름은 '미래1공원'이다. 동남쪽은 미래2공원. 서쪽에는 문화1공원, 문화2공원이 있다. 오늘의 주인공은 그중에서도 미래1공원이다. 


왜냐하면, 미래1공원에서는 무려 덩크슛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구, 좋아하세요? (슬램덩크의 유명한 대사죠) 어렸을 때는 농구를 정말 좋아했다. 중학교 시절, 마음 맞는 친구 네 명과 5인조로 팀을 이루었다. 일요일 새벽 5시가 되면, 각자의 집 앞에서 만났다. 한 시간을 걸어야 나오는 실내 농구장이 6시에 문을 열기 때문이다. 농구장에 도착하면, 우리와 종종 맞붙는 다른 5인조 팀도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두 팀은... 지금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만, 세 시간 동안 농구 경기를 했다. 어디서 그런 체력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시절이었다. 슬램덩크는 모든 초중고등학생의 필독서였다. 한 학교에 자칭 서태웅이 250명 정도는 존재하던 시절이다. 우리는 9시가 되어 농구 동호회 어른들이 농구장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경기를 했다. 


세 시간 동안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그제야 갈증을 느꼈다. 그러면 '콜라독립 815'라는 이름의 음료수를 마셨다. 콜라 OEM을 하던 범양식품에서 직접 출시했던 우리나라 콜라였다. 다섯 명이 255ml 콜라 한 캔을 나눠 마셨다. 어쨌든 콜라독립 815가 코카콜라보다 쌌기 때문이다. 그러면 3시간의 격한 운동으로 인한 피로가 그대로 풀렸다. 15세는 참으로 아름다운 나이다. 


한 번은 동네 공터에 있는 농구대 중 한 곳이 고장 나 내려앉은 적이 있다. 174cm인 나도 덩크슛을 할 수 있을 만큼 낮아졌다. 종종 경기를 하던 두 팀은 거기서 경기를 하기도 했다. 전반 후반으로 나누고 한쪽이 한 번씩 낮은 골대로 공격을 했다. 나름대로 공평한 룰이었다. 경기 중에 단독 찬스가 나서 (내 딴에는) 멋지게 덩크를 성공하기도 했다. 


한 번은 고등학생 형들이 등장해 코트를 못 쓰게 해서 주눅이 들기도 했다. 그러더니 자기들끼리 신나게 덩크 연습을 하였다. 두 달쯤 지나, 공터의 농구대는 누군가 수리를 했다. 그리고 중학생들은 다시는 덩크를 시도하지 못하였다. 


시간은 25년 뒤로 흘러, 이제는 더 이상 나이 많은 형들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마침 서귀포 신시가지에는 곳곳에 비어 있는 농구코트가 있다. 37세의 나는 오랜만에 농구공을 사서 혼자 슛 연습을 했다. 어떤 코트에 가도 지금은 내가 가장 나이가 많지만, 여전히 주눅이 든다. 주눅 들지 않고 농구를 할 수 있는 나이는 정해져 있나 보다. 


그러다 우연히 미래1공원을 발견한 것이다. 미래1공원에 위치한 농구코트는 이상할 정도로 낮게 달려 있다. 새벽에 동네 산책을 하다가 농구 골대를 보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높이가 너무 낮은 것이다. 손을 뻗어 보았다. 손 끝에서 링은 한 2-30cm밖에 안되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점프를 해 보았다. 가볍게 손이 닿았다. 


언젠가 여기 와서 덩크를 해 봐야겠다! 나는 결심했다. (37세가 하기엔 좀 유치한 결심이긴 하지만) 그러고 나서 한 달쯤 되었을까? 석양이 유독 붉은 어느 여름날, 농구공을 들고 아내와 개를 억지로 이끌어 미래1공원을 찾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동네 공원에 찾아가 낮은 농구대에서 덩크를 하는 건 너무 한심해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루해하는 아내를 뒤로 하고, 투핸드 덩크, 원핸드 덩크, 슬램덩크...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전혀 감흥 없는 아내에게 인증샷을 남겨야 한다며 동영상을 찍게 했다. 아내는 마지못해 찍어 주고는 한 마디 거들었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신난 표정이야?" 개는 농구장 주변의 잡초 냄새를 맡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보라님이 비슷한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었다. 군 시절, 부대에 조금 낮은 농구 골대가 있었다고. 거기서 덩크를 해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보라님 블로그에 쓴 적이 있는데, 어떤 개인 투자자분이 댓글을 남겼다. 


골대를 낮추면 인생이 편해지는 것. 큰 깨달음을 쉽게 배웁니다. 


사실 그분은 보수적인 가치투자로 성공한, 꽤 알려진 투자자였다. 굳이 위험한 투자를 하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다. 그분은 낮은 골대에서 덩크슛을 반복해 부자가 되신 분이다. 어지간히 공격적인 여의도 타짜들보다 훨씬 더 부자가 되어 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간단한 지혜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