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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머리 제이슨 Jun 13. 2020

물에 젖은 생쥐처럼 걷기

 올해부터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걷기'를 운동으로 부르는 게 조금 부끄럽긴 하다. 하지만 제대로 걸어 보면 이것도 상당한 운동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가령 1시간 30분을 걷는다면 40분 동안 수영을 하는 것과 비슷한 칼로리가 소모된다(몸무게 78kg 기준). 


 그래서 아침마다 꽤 긴 산책을 하고 있다. 우선 한 시간 10분 정도 걸려서 동네를 한 바퀴 돈다. 집을 나서 언덕길을 향해 계속 올라간다. 그러다가 중산간로를 만나면 도로를 따라 옆 동네까지 걷는다. 산 중턱에서 중간중간 내다보이는 월드컵 경기장과 멀리 떠 있는 섬의 모습은 정말 멋지다. 그렇게 걷다가 신시가지가 끝나는 경계면에서 다시 방향을 틀어 바다 방향으로 걸어 내려온다. 중간에 카페에 들러 아침 할인가 1200원으로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거나 그림을 잠깐 그린 후, 집으로 돌아온다. 남은 거리는 대충 20분 정도 걸린다. 카페에서 쉬는 시간을 포함하면 2시간 정도 걸린다. 생각보다 힘들고, 생각보다 할 만하다. 

 

 성공한 창작자들 중 산책을 추천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데, 이는 산책을 해 보면 금방 깨달을 수 있다. 산책의 가장 좋은 점은, 휴대폰을 보지 않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팟캐스트나 음악을 듣기는 하지만 화면을 보지는 않는다. 화면을 보면서 걷는 건 상당히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 경관을 관찰하기도 하고, 가끔 다리만 움직일 뿐 머릿속으로는 전혀 다른 공상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흘러가는 생산적인 시간이다. 


 하지만 장마가 막 시작된 6월 어느 날의 산책길은 그다지 생산적이지도, 평화롭지도 않았다. 


 전날 비가 상당히 많이 내리다 잠깐 그친 새벽 시간이었다. 주변에 안개가 자욱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해 보았는데 느낌상 비가 더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서귀포에 좀 살다 보면 날씨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을 조금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 오늘은 봐줄 거야. 바람은 잠깐 쉬어주지.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올 거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시지. 이런 이야기들을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산책을 시작하였다. 휴대폰과 이어폰만 집어 들고 책은 집에 두었다. 그리고 젖어도 금방 마르는 옷을 입었다. 혹시 모르니 말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걸었는데, 비는 오지 않았다. 안개는 바로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했다. 서귀포의 안개는 다른 지역과는 차원이 다르다. 마스크팩을 붙이고 걷는 기분이다. (실제로 마스크팩을 한 것처럼 엄청난 수분 보충이 된다) 하지만 한 시간쯤 되었을 때 갑자기 비가 많이 오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나는 이제 서귀포 날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데 말이다. 분명히 아까는 더 비를 뿌리지는 않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꽤 굵었다. 이내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건 그칠 수 없는 비다. 미안해 아까는 거짓말이었어. 서귀포의 날씨는 나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이 새끼가. 


 가성비 좋기로 소문난 호텔에 딸린 편의점의 처마 밑에 서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아내에게 빌린 에어팟 프로였다. 나는 젖어도 된다. 내 휴대폰도 조금 젖어도 된다. 하지만 에어팟은 안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1분 정도 더 생각에 잠긴 후, 나는 편의점에서 캔커피와 여행용 티슈를 샀다. 그리고 점원에게 담을 수 있는 비닐봉지를 달라고 했다. 일단 여행용 티슈 안쪽에 에어팟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티슈를 닫은 후 휴대폰과 함께 겹치고 비닐봉지에 넣었다. 주둥이를 묶어 물이 새지 않도록 한 후, 후드 앞쪽에 있는 배주머니에 집어넣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전자기기는 젖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멋지게 임기응변을 한 나 자신이 대견했다. 주변의 지형과 도구를 이용해 봉변을 모면하던 맥가이버가 생각났다. 


 에어팟은 결국 젖지 않았다. 하지만 집으로 오는 동안, 비는 전혀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나와 내 옷은 완전히 젖었다. 검은 바지에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비에 홀딱 젖은 채로 걷는 모습이 과히 우스꽝스러웠다. 슬리퍼가 자꾸 미끄러져 큰 보폭으로 걷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40분을 걸었다. 멀리서 보면 물에 젖은 큰 생쥐가 직립보행을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름의 재미는 있었다. 일단 나는 비에 젖는 걸 그렇게 싫어하는 편은 아니다. 두피에 열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다. 비를 맞고 걸을 때 나름의 카타르시스도 있다. 물론 서울이었다면 카타르시스보다 배기가스가 섞인 산성비에 대한 걱정이 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비를 맞고 걸어야 한다면, 역시 서귀포를 선택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가장 깨끗한 곳 중 하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나는 종종걸음으로 집까지 왔다. 그 날 젖은 옷들은 욕실에 걸어 두었는데, 3일 동안 마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다. 왜 난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버릴 생각을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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