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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hai park Sep 17. 2020

<작은 아씨들>

소녀들의 감성 에세이

루이자 메이 올컷의 소설 <작은 아씨들> 은 1868년에 출간되었다. 그 이후 여러 차례 영화로도 제작된 고전 중의 고전이다. 1917, 1918, 1933, 1949, 1994년에 각각 영화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2019년에, 21세기에 다시 한번  영화로 만날 수 있었다. 영화는 좋은 평가를 받으며 유수의 영화제 주요 부분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우리나라에 개봉했을 때도 좋은 평가와 입소문이 뒤따랐다. 사람들의 후한 평가는 괜한 헛소문이 아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은 아씨들> 은 굉장히 잘 만든 영화다. 그레타 거윅 감독의 이 영화는 굉장히 잘 짜인 드라마다. 근래 이 영화만큼 균형 잡히고 탄탄한 드라마를 본 일이 거의 없다. 메그, 조, 베스, 에이미 4 자매의 이야기는 100년 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마음에 유효하게 작용했다. 이것은 탄탄한 시나리오와 섬세한 연출, 배우들의 호연이 있기에 가능했다.


<작은 아씨들> 은 얼핏 보면 조의 이야기만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네 자매들을 두루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담고 있다. 이 소설과 영화의 제목이 '작은 아씨'가 아닌 '작은 아씨들'인 이유다. 개성이 뚜렷한 4 자매의 매력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배려의 연출이 돋보인다.  그런 와중에도 조의 캐릭터가 서사의 중심을 딱 잡고 있으니, 영화가 끝까지 힘을 잃지 않고 전개된다.


영화를 보면서 김수현 작가의 에세이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가 떠올랐다. 책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책 제목이 왠지 네 자매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연기가 하고 싶은 메그, 글을 쓰고 싶은 조, 피아노가 치고 싶은 베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에이미. 작은 아씨들은 주변의 기대나 사회적 통념보다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당연히 여러 어려움들에 부딪힌다. 여자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남자에게 결혼하는 게 제일이라는 시대의 편견에 맞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특정한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해 설교를 하진 않는다. 아주 현명한 연출이다. 자매들을 세상에 맞선 정의감 넘치는 여전사로 그리기보다는, 부딪히면서 성장하는 하나의 소중한 인격체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점이 이야기의 힘으로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작은 아씨들> 만의 매력이다.


베스를 제외한 세 자매는 끝내 모두 결혼을 하기는 하지만, 돈 많은 남자를 만나라는 대고모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선택이었다. 사랑의 선택 또한 내 '미음의 소리'를 따르는 결정이었다. 결국 이 또한 철저히 나로 살아야 가능한 것이다. <작은 아씨들> 이 자매들의 자아를 찾기까지 보여주는 이야기들은 매우 세심하다. 어떤 외부 세력과의 거센 싸움이나 투쟁이 아니다. 온전히 내면의 성장과 깨달음으로 사회적 통념을 거스르고 있다. 가난하지만 사랑을 택한 메그, 작가로서 멋지게 데뷔를 한 조, 피아노로 대저택을 아름답게 장식한 베스, 오랜 첫사랑과 결혼을 한 에이미. 네 자매 모두 나로 살기로 했고, 나를 사랑한 결과가 결국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작은 아씨들>은 성장과 아픔, 이별, 시련, 상처에 대한 극복까지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것들을 담고 있다. 그 시기에 자라면서 누구나 느끼는 감정과 감정의 변화들을 다루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19세기 미국의 10대 소녀들이지만, 이 보편의 정서는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보편적인 서사의 자연스러움이 전체 관람가라는 타이틀에 빛을 더한다. 물론 훌륭한 원작이 있어 가능했겠지만, 원작을 잘 표현한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도 그 자체로 아주 뛰어나다. 또한 조의 캐릭터를 통해 지금 시대를 반영하는 새로운 해석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도를 넘는 설교는 하지 않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재해석인가.




소녀들은 각자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그녀들만의 에세이를 집필 중이다. 소녀들뿐만이 아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쓰는 것이다. 주변의 기대, 사회적 가치관, 고려할 수는 있겠으나 절대적 기준은 될 수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쉽지 않다. 강산이 10번도 넘게 바뀌었지만 소설의 이야기처럼 나 자체로 산다는 건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이 결국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이다. 나로 살았을 때 나를 이해할 수 있고 나를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바탕될 때 다른 사람도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도 그들만의 '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세상을 더 넓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하지만 진솔한 이야기는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다른 얼굴로 여러 번 우리를 찾아왔다. 뻔한 얘기를 사람들이 계속하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우리는 아직도 어렵다.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알지 못하는 일이 많다. 어쩌면 계속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거짓말은 나쁘다. 제일 나쁜 거짓말은 바로 자기 자신한테 하는 거짓말이다.



PS: 엠마 왓슨이 연기한 '메그'는 원래 엠마 톰슨이 맡기로 했었으나, 스케줄 문제로 엠마 왓슨으로 교체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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