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의 어느 날이 떠오른다. 방과 후 TV 앞에 앉아 일본 만화를 보던 내가 있다. '슈퍼 그랑죠', '다간'이라는 애니메이션은 나에게 그야말로 꿈의 세계였다. 람보르기니 경찰차가 로봇으로 변신하더니 ktx 열차와 전투기와 합쳐져 거대 로봇이 되고, 트럭과 레이싱카, 드릴 전차가 등장하고 F-14 전투기와 국내선 여객기와 우주 왕복선, 나중에는 사자 로봇이 등장하더니 인류를 구하는 로봇이 되는 광경은 감격이었다. 마법의 힘으로 땅과 물, 그리고 하늘에서 등장하는 마동왕 로봇들과 어린이들이 달과 우주의 평화를 지키는 에피소드.
만화에는 정의와 우정, 그리고 희생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 어린이 만화치고는 후반부로 갈수록 우리의 주인공들이 사망하고 지구에 멸망 위기가 다가오고 우리의 영웅 로봇들의 화력으로는 절대 쓰러지지 않는 외계 세력의 소름 돋는 모습들까지. 어린 나이에 무서운 세계를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그때는 단순히 재밌어서 봤을 뿐이지만,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 유튜브에서 그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다시 보기가 올라와 있어서다. 추억이 떠오르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예전과는 달리 내가 집중한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배경음악(BGM 브금)이다. 다간과 랜드 바이슨, 슈퍼 그랑죠가 변신하거나 합체할 때 나오는 그 역동적인 음악은 지금도 나에게 에너지를 준다. 영상편집이라는 특기를 활용해 BGM를 추출, 폰에 저장해놓고 퇴근 후에는 만화 속 평화로운 BGM을, 출근 전 다운된 몸에 활력을 주는 데는 로봇들이 합체할 때의 역동적인 BGM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여자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도 꽤나 많이 봤다. 2살 터울의 여동생 덕분이었다. '사랑의 천사 웨딩피치', '천사소녀 네티', '세일러문' 같은 작품들은 본의 아니게 접하게 되었다. 단지 세일러문과 웨딩피치는 치마핏이 죄다 짧아서 어릴 적 내게 조금은 부끄럽고 야했다.
하지만 검은 스타킹을 입었던 '천사소녀 네티'는 그나마 편하게 볼 수 있었다. 네티와 남자친구의 귀여운 설정이 좋았다. 남자친구는 매일 도둑을 쫓는 경찰 역할을 하고, 네티는 매일 루팡으로 변신하는데, 남자친구는 그녀가 자신의 여자친구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추격하는 이야기였다. 결국엔 들통나는 과정이 너무 귀엽고, 나름대로 스릴 넘쳤다.
시간이 흘러 나는 어른이 되었고, 사회라는 무대에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예쁜 여자에게 끌리고, 1억이 넘는 제네시스 차를 구입하고 싶고, 주택청약 당첨으로 아파트를 갖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목표들을 이루려 애쓰는 삶은 가끔 너무 버겁게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종종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머리가 복잡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 속에서, 적어도 주 1회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추억을 즐기고 싶다.
그럴 때면 다간이나 그랑죠, 네티 같은 옛날 애니메이션을 다시 본다. 그 시절의 나처럼 아무런 걱정 없이 몰입하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어릴 적의 나는 단순히 재밌어서 봤던 애니메이션이 이제는 힐링의 도구가 되었다. 그때의 BGM, 사랑스럽고 용기를 주는 스토리, 그리고 순수했던 내가 잠시나마 다시 내 곁에 찾아오는 것 같아 참 좋다. 그래서 일상으로 돌아올 때는 마음이 힐링 되어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충전되어 있다.
나는 요즘 종종 운전할 때 만화들의 BGM을 듣는다. 영상편집이라는 특기를 활용해 음악을 추출, 폰에 저장해놓고 그레이트 다간과 랜드 바이슨, 그랑죠가 변신하거나 합체할 때 나오는 역동적인 음악은 출근 전 에너지를 받기 위해, 평화로운 BGM은 퇴근길 운전을 하며 몸을 릴랙스하는 수단으로.
지금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에 얽매여 산다. 돈, 직장, 성공, 인간관계, 끝없이 이어지는 사회적 책임. 하지만 이런 삶 속에서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 모두에게는 순수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것. 그 시절에는 세상이 단순했고, 작은 것에도 웃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 모두에게 '자체 어린이날'이 필요하다고. 주 1회만이라도 현실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살아보는 날을 만들자.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추억에 빠지거나, 공원에서 강아지와 뛰어놀아도 좋다. 무엇을 하든, 그 시간만큼은 우리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순수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어린이는 어른이 되길 꿈꾸지만, 어른은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우리는 성장 속에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스스로를 위한 '어린이날'을 만든다면 잃어버린 순수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진심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을 통해 우리 삶에 더 많은 웃음과 여유를 선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