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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Nov 28. 2023

Butcher's Crossing






 힘들게 어떤 일을 마치고 나면 내 마음의 자정능력 회복을 위해 혼자 바다를 찾아 해풍을 마주하거나 성주산 휴양림의 숲길을 걷는다. 다른 사람들과는 되도록 멀리 떨어져 인간의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내 숨소리와 자연의 소리에만 집중하는 시간. 그럴 때 가끔 드레곤볼의 천진반처럼 내 이마에 나도 몰랐던 또 하나의 눈이 떠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3의 눈" 말이다. 들판과 숲에 서면 무無가 되어 모든 걸 보고 모든 걸 느낄 수 있다고 믿으며 그때의 나는 "투명한 눈동자"가 된다고 했던 에머슨의 말처럼 거대한 자연 앞에 서면 그 힘에 기대어 일상에서 묻어온 온갖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흩어져 사라지고 다시 새롭게 정비되는 마음결을 느낄 수 있다.






<부처스 크로싱>의 주인공 윌 앤드루스도 이런 마음으로 도시를 벗어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버드 3학년 생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물려받은 큰아버지의 유산을 갖고 부처스 크로싱이라는 서부의 황량한 마을을 찾아온다.



발길 가는 대로 정처 없이 걸었다. 거기서 잠시 머뭇거리다 컴퍼스의 바늘처럼 이리저리 돌았다. 갈 곳을 발견하고 천천히 멈춰 섰다. 그는 자연에는 미묘한 자력磁力이 있다고 믿었다. 오래전부터 가졌던 믿음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그 자력은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이고, 그 방향은 그가 걸어온 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이 그토록 단순하게 펼쳐진 부처스 크로싱에서 지낸 단 며칠 동안, 자연이 가진 강박적인 충동의 힘은 너무나도 강해서 그의 의지, 습관, 생각에 충격을 주기 충분하다는 걸 느꼈다.

                - 부처스 크로싱 p. 60 중에서





 아버지의 인연으로 마을에서 가죽장사 중개인을 하던 맥도널드를 찾아간 앤드루스는  자신의 서류 작업을 도와달라는 부탁도 만류하고 들소 떼 사냥으로 이름난 밀러와 그의 일행을 따라 아무도 보지 못한 들소 떼를 찾아 황량한 평원과 고원지대를 찾다. 여행을 떠나기 전 대륙의 절반을 횡단해 와 자신이 원하던 자신의 삶과 자아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투명한 눈"을 갖게 되길 바랐던 앤드루스는 여행 하루 만에 온몸이 통증에 시달리다 무감각해지는 기묘한 경험을 한다. 어쩌면 앞으로 만나게 될 모든 일들에 대한 일종의 예방주사와 같은 감각의 상실. 그는 무엇을 더 잃어야 이 여정을 완성할 수 있을까?



 윌리엄스의 묘사 속 서부의 황량한 대지는 인간의 흔적보다는 자연이 만들어놓은 생명체의 말없는 순응을 보여주고 있다. 물줄기를 찾지 못해 죽을 위기에 처하고, 거대한 산자락의 비탈길을 걸어가며 몸의 모든 감각이 고통 속에 둔해진 채 걷고 또 걷는 이들의 모습은 순례자들처럼도 보인다. 몇 차례 생의 고비를 넘기고 드디어 만나게 된 들소 떼. 밀러는 노련한 사냥꾼답게 들소 무리의  우두머리부터 처치한다. 대장을 잃은 들소들은 우왕좌왕하며 움직이다 순식간에 도륙을 당하는데, 가죽을 벗기는 일에 전문인 슈나이더조차 밀러가 살상하는 들소 떼 무리의 수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무분별한 살육이 이어진다. 총에 맞고 진 들소를 보고 도망쳐버린 앤드루스는 그날 밤 자신이 그 장면으로부터 도망친 이유에 대해 떠올린다.



겨우 조금 전만 해도 당당하고 고귀하며 생명의 위엄으로 가득했던 존재가 이제 속절없이 가죽이 완전히 벗겨진 채 죽은 고깃덩이가 되어, 존재 자체 또는 그 존재에 대한 앤드루스의 개념을 완전히 빼앗긴 채 기괴하게 조롱하듯 눈앞에 걸렸기 때문에 구역질이 나서 도망쳤다. 그것은 들소 자신도, 앤드루스가 상상했던 들소도 아니었다. 그 들소는 살해당했다. 앤드루스는 그 살해를 통해 자기 안에 있던 무언가가 파괴되는 걸 느꼈다. 그걸 마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 부처스 크로싱 p.188




 그가 마주한 또 다른 생명에 대한 경탄이 곧 그걸 파괴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자괴로 바뀌며 여정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올 때 최상급 들소가죽을 얻을 욕심에 눈이 멀어버린 일행의 대장인 밀러는 아갈 날을 미루며 계속해서 사냥을 했고, 무리한 사냥에 반기를 들던 슈나이더마저 밀러의 회유에 설득당해 잔류하고 만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그들은 눈을 만난다. 순식간에 폭설로 변해 내린 눈으로 레버넌트의 한 장면처럼 갓 벗겨낸 들소가죽을 임시 보호처로 만들어 눈을 피하는데, 들소에게 기생하던 진드기가 살을 물어뜯고 매서운 추위가 그들을 짓누르며 생존의 극한에 직면하게 된다.


 그들은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도살자의 건널목 - Bucher's Crossing은 한 청년의 치기 어린 도전과 자연에 대한 동경이 인간의 탐욕과 만났을 때 어떻게 훼손되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이 처음 여행을 떠나 온 이유조차 희미해져 가던 앤드루스. 천신만고 끝에 부처스 크로싱에 돌아왔지만 인간들의 소비품목이 바뀌자 그들이 목숨 걸고 지켜 온 들소가죽이 헐값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장면을 보면 또 다른 훼손과 멸종이 예고된 다른 생명에 대한 애도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불과 1년 만에 급변한 경제상황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 그는 이런 말을 한다.


그 허영심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깜빡거리던 합숙소 등불의 불빛 아래서 맥도널드가 말했던 그 무無였다. 찰리 호지의 시선에 있었던 밝고 푸른 공허감 - 그는 찰리의 눈 안에서 그 공허감을 언뜻 보고 프랜신에게 말해 주려 애썼다-이었다. 슈나이더가 강에서 말발굽이 얼굴을 당혹하게 만들기 직전에 보였던 경멸적인 표정이었다. 산에서 하얀 눈보라가 몰아치기 전에 밀러의 얼굴에 나타났던 맹목적인 인내심이었다. - 중략-
 맥도널드가 가죽이 불타 버리는데 광분해 밀러를 쫓아다니는 동안, 얼굴에 격노한 가면을 쓴 것처럼 만든 끝없는 절망이었다.

                       - 부처스 크로싱, p.357




 소년의 치기와 허영으로 시작된 여정의 완성은 잃어버린 자신의 자아를 대체할 다른 존재를 찾아 떠다는 또 다른 여정의 시작으로 마무리된다. 여로형 소설이 주는 안정적인 구조 속에 길 위에서 성장하고, 잃어버리고, 무너지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들을 통해 인간 욕망의 덧없음에 대해 말없이 경종을 울리는 소설이다. 마음의 견고한 심지가 없다면 자신을 찾아 떠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게 만들어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의 또 다른 소설 <스토너>가 잔잔한 흐름으로 평범한 날들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로해 주는 소설이었다면, 부처스 크로싱은 다양한 인물들이 연결된 감정선들이 빠르게 교차하며 한 폭의 아름다운 테피스트리를 만들어내는 소설이다. 그 배경은 광활한 서부, 점처럼 찍힌 작은 인물들의 발자국이 눈이 녹아내린 강물에 지워질 듯 간간히 새겨진, 소실점은 산등성이 어딘가로 가만히 감춰둔 마지막을 가만히 덮는다.














#부처스크로싱

#존윌리엄스

#공유서재무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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