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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Nov 21. 2023

툰드라

삶의 희망을 찾는 여정을 따라






 총 8개의 단편소설을 엮어낸 이 책은 1987년 <문학사상>에 실린 "석양꽃"부터 2022년 <현대문학> 11월호에 실린 "툰드라"까지 작가 인생의 정수들이 한데 모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조각가 최종태 선생의 <먹빛의 자코메티> 그림이 잎이 뾰족한 침엽수림 한가운데 서 있는 여인의 표상으로 자리한 표지에 홀리듯 손에 들었다.





 말들은 인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고고하게 다가오는데 주영은 진정한 주인을 위해 겸손하게 길을 비켜주었다. 하늘엔 어느새 노을이 깔려 있었다. 문득 고원을 향해 돌아서니 고원 아래로 수십 마리의 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신의 사랑을 받고 돌아오는 듯 평온한 귀가였다.

 광막한 자연 속에 두 사람 빼고 인간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넓이를 잴 수 없는 하늘 아래 온통 말과 새들이 대지 위를 누비고 있었다. 더없이 완전한 풍경이었다. 낙원이 거기 있었다. 고원 위에서 스투파도 자연의 주인들을 내려다보는데 해탈이 거기 있었다.

                              - 툰드라, p55





표제작부터 흥미롭다. 주영과 승민. 오랜 불륜관계를 끝내기 위해 몽골로 여행을 떠난 그들은 1년에 1번씩만이라도 몽골에서 만나자는 승민의 부탁에도 답을 하지 않은 주영 혼자 하루 더 하게 된 여행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홀로 남은 여행에서 無人의 절에서 스투파(탑)만 남은 모습을 바라보며 숭고한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과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것에서 오는 진정한 자유를 느끼게 된다. 제도권 밖에서 그곳에 속하지 않은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우리가 사는 사회 속 제도들의 허점을 꼬집는 질문들을 던지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 내가 사는 사회를 들여다보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인간은 사랑에 의존하고 신에 매달리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원인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생긴다는 연기의 법칙만 깨달으면 밖에서 구원을 찾으려 헤매지는 않아요. 내가 갖고 태어난 업 - 나라와 부모와 내 먼 전전생부터 축적된 습의 유전자, 내 몸을 숙주로 살아가는 쾌락 집착 슬픔이여,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으로 인한 번뇌여, 늙고 병들고 죽는 두려움이여, 여기서 해방되는 그 자유가 바로 구원이 아닌가.

 스님들이 청춘을 바쳐 선을 하는 건 그것이 자유로 가는 지름길이고 생의 정수精髓이기에. 일생이 얼마나 되관대 갈애에만 허덕이랴. 되풀이되는 업의 윤회를 끊으려면 먼저 자신을 관觀 해야지. 자기를 통하지 않고는 진정한 구원이란 없어요.

                                   - 석양꽃 p.278




 나를 진심으로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진정한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란 스님의 말을 통해 작가는 이렇게 치열하게 소설을 쓰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작가 이문열은 강석경을 "치열한 영혼의 소유자"로 "적색보다 더 높은 온도로 타오르는 붉은 불꽃"이라 말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보다 더 뜨겁고 정순하게 타올라 삶을 연마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문장 하나하나가 끌로 새겨 넣은 전과 같이 읽힌다.



작가 인터뷰에서 그녀는 우리들의 삶이 툰드라 위를 걸어가는 여정이라 말한다. 오래된 모든 생명의 뼛조각마저 풍화되어 사라진 곳에서 드문드문 피어난 풀들을 찾아 떠도는 순록들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삶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희망을 찾아 떠나는 길고 긴 여정을 닮았다 한다.



또한 가는 삶은 끊임없는 탐색의 과정이라 말한다. 강석경의 첫 작품 빨간 넥타이에서 자신이 그리는 그림에서 빨간색을 즐겨 쓰는 광고대행사 직장에 다니던 주인공이 자신을 옥죄던 푸른 넥타이를 벗어던지고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빨간 넥타이를 하게 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초기작에서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탐색하며 사유하는 힘으로 완성된 문장을 읽다 보면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며 끊임없이 묻는 사람만이 찾을 수 있는 번뇌와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 그 길이 내게도 어렴풋이 보인다.



작품들 안의 주인공의 여전히 숲 속의 방, 소양처럼  한국사회의 제도권 안에서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존재들이다. 결혼을 거부하고, 타인과의 소통 속에서 불합리한 관계에 놓여 고통받는 존재들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여정 속에서 비로소 정착할 토양을 찾아내 지친 몸을 누이며 긴 숨을 내쉰다. 그 길을 따라 걷는 독자들은 함축된 의미들 속 보이지 않게 던져놓은 작가의 질문의 올무를 피하지 못해 덜컥 걸리게 되면 읽는 걸 멈추고 주인공에 나를 대입시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순간과 만나게 된다.


 그 순간이 매우 행복하다. 일상이란 쳇바퀴가 멈추지 않고 돌아가며 생각할 시간도, 어떤 여유도 갖지 못한 채 하루를 내 안에 욱여넣느라 바쁜 날들에 쐐기를 박고 멈춰 서게 만드는 문장들은 되뇔수록 아름다운 음률이 되어 내게 스며든다.






 자리에서 일어나 또다시 길을 나서니 눈앞에 하얀 은사시나무가 보인다. 큰 몸통 위에 하늘이 걸려 있어 올려다보니 구멍이 뻥 뚫려 있다. 어떻게 저러고도 살았을까 싶을 만큼 큰 구멍이다. 그 구멍이 왠지 낯익다 했더니 <산해경> 책 속에 그려진 관흉인 가슴이 겹쳐졌다. - (중략) -

"어떻게 살았는지 신기해요. 가지도 잎도 멀쩡하게 자라고."

"온통 벌레들이 차지해서 걱정될 만큼 잎에 구멍이 숭숭 난 나무도 많아요. 식물학 책 보니 숲의 규칙이 있는데 잎의 이십 프로는 숲 속 다른 동물들을 먹이기 위해 만든대요. 이게 자연의 지혜라. 인간도 지구에 사는 대가로 가슴을 갉아먹히는지 모르겠어. 그 고통을 이십 프로는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되지 싶어요. 무심한 천지가 준 내 업인가, 하고. 분노도 자책도 다 가을 잎처럼 털어 묻고...... 여기가 무장사지 가는 길 아닙니까."

                     - 가멸사加滅寺  p.247







나는 무장사로 가는 길 위에서, 몽골의 초원 한복판에서, 내 앞을 오가는 이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는 작고 낡은 스투파가 되어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존재가 된다. 오직 문학만이 가질 수 있는 온전한 힘, 상상과 몰입의 순간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는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툰드라.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과 같이 읽고 싶습니다. 이렇게 두 번째 책을 읽어 드립니다.















#강석경

#툰드라

#대천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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