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한 사람의 부재로 쌓여가는 마음이 집이 된다면 그 집의 내부는 너무도 많은 방과 복잡한 복도와 수많은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리라. 수납공간마다 물건들이 가득하고 물건들 사이 거울은 폐허의 땅을 형상화한 것 같은 먼지로 얼룩진 곳, 암담하도록 캄캄한 곳과 폭력적일 만큼 환한 곳이 섞여 있고 창 밖의 풍경엔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그런 집......
- 겨울을 지나가다, 조해진 p.20
정미는 여전히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정미는 지금도 가끔씩 새벽에 돌연 깨어나 집 안 곳곳에 코를 들이밀며 돌아다니곤 했다. 정미는 엄마와의 숨바꼭질이 이어지고 있으며 자신은 언제까지라도 술래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여기는 듯했고, 나는 그것이 정미 몫의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 p. 70
존재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 사라진 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녹은 눈과 얼음은 기화하여 구름의 일부로 소급될 것이고 구름은 다시 비로 내려雨水 부지런히 순환하는 지구라는 거대한 기차에 도달할 터였다. 부재하면서 존재한다는 것, 부재로써 현존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 이번 겨울에 나는 그것을 배웠다.
슬픔이 만들어지는 계절을 지나가면서, 슬픔으로 짜였지만 정작 그 슬픔이 결핍된 옷을 입은 채,
그리고 그 결핍이 이번 슬픔의 필연적인 정체성이란 걸 가까스로 깨달으며.....
- p.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