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아주 작은 조각 하나에서였다. 동그란 얼굴에 눈, 코, 입도 동그랗게 새겨진 동전 같은 것들이 바닥에 잔뜩 깔려있다. 좁은 복도를 가득 채우며 자리한 조각들은 무슨 이유이고, 누가 만들었을까에서 시작된 호기심에 시작된 검색이 베를린의 유대인 박물관으로 나를 이끌었다.
바로 이 작품입니다.
메나슈 카디시만(Menashe Kadishman)이 만든 낙엽(Shalekhet)이란 이름의 조형물은 홀로코스트 당시 희생된 유대인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작품이라 한다. 복도에 가득 깔린 조형물을 사람들이 밟고 지나갈 때 생기는 마찰음이 크기가 다른 조형물들 사이 울려 퍼지며 마치 그들의 비명소리처럼도 들린다 한다. 직접 가서 보고 싶었다.
박물관 안의 추방의 정원 속 49개의 높이가 다른 콘크리트 기둥들 사이 까마득하게 보이는 절망의 하늘을 지나 예리한 칼날이 가로지르는 선들이 천장을 분할하며 지나는 홀로코스트 타워와 벽 위 닿을 수 없는 곳에 놓인 사다리까지. 독일인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참회하고 역사 속 희생자들을 잊지 않기 위해 추모하는 방식이 내 마음과 눈길을 오래 붙들었다.
홀로코스트, 성경 속 등장하는 그리스어로 희생 제물을 완전히 태워 죽이는 행위를 말한다. 종의 우월성을 근거로 지구상에서 마음대로 특정 민족의 멸종을 계획하고 시행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며 무참할 정도로 비정했던 나치의 인종말살 정책을 보고 자란 이들이 자신들이 그들에게 진 마음의 빚과 생존의 빚을 직시하고 갚아가는 과정이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을 통해 보인다. 친일에 대한 청산할 것들이 도처에 산재한 우리나라는 묻고 지우기를 강요하는 현대사를 이들은 묵묵히 곱씹으며 기억하라 말하고 있다. 꼭 한번 가보고 싶다. 이곳,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메나슈 카디시만의 낙엽, 유대인박물관 공식 홈페이지 속 영상을 재생하면 사람들이 걷는 발자국을 따라 서늘한 버석거림이 시작된다. 저마다의 비명소리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깊은 물속 수압에 흩어진 소리들로 변해갈 때, 난 오래전 타티아나 드 로즈네의 소설로 만난 소녀, 사라 스타르진스키를 떠올렸다.
모두가 곤한 잠에 빠진 새벽, 성마른 노크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소녀 사라는 엄마를 깨운다. 지난밤 엄마와 아빠의 대화 속에서 은밀히 오가던 비밀스럽고 공포스러운 몇 개의 단어들이 밤의 정적을 가르는 노크소리가 되어 두려움의 실체를 확인시킨다. 사라는 그들의 재촉에 급한 마음에 4살 된 동생 미셸을 비밀통로 사이 벽장에 숨긴 뒤 열쇠로 잠그고, 자신들을 불러 낸 프랑스 경찰들을 따라 집을 나선다. 곧 다시 돌아와 이들의 위협 속에서 동생을 꺼내 줄 생각을 하고 집을 나선 사라와 숨어있다 잡혀가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자진해서 걸어나 온 그녀의 아빠는 프랑스의 사이클 경기장 벨로드롬 디베르에 수용된다.
소설 속 주인공 사라는 1942년 7월 16일과 17일, 파리와 근교에서 체포된 13,152명의 유대인들 중 한 명이었다. 비시 정부 치하의 경찰이 나치 점령군의 명령에 따라 적극적으로 체포한 1,129명의 남성과 2,916명의 여성, 4,115명의 어린이는 그곳 벨디브에 갇혀 인간 이하의 몰골로 지내다 아이와 어른들이 분리되어 각각 수용소로 흩어졌다 이후 폴란드로 이송되어 살해당한다. 1941년부터 44년 사이,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프랑스인들이 꺼내보기 힘들어하는 역사 속 사건을 소재로 작가는 두 명의 여인을 등장시킨다.
42년의 어린 소녀 사라 스타르진스키와 2002년의 줄리아 자먼드. 두 개의 복층으로 이루어진 시간대는 줄리아의 남편 베르트랑이 할머니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생통주 가의 아파트를 접점으로 잇닿게 된다.
자신들의 이웃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생활을 공유하며 살아가던 이들의 옷에 노란 별이 붙자 세워진 투명한 벽을 따라 묵인하며 외면했던 사람들. 그들 내면의 죄의식이 벽장에 갇혀버린 동생을 구하러 오기 위해 수용소를 탈출한 사라에 의해 촉발되고, 싼값에 아파트를 차지하고 자신들의 일상을 영위하던 이들의 평온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2010년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은 이 소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현대의 주인공 아메리켄이라 불리며 파리지앵의 집합체인 시댁에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 줄리아가 취재차 시작한 벨디브 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이 될수록 사건을 들여다보는 나 또한 점점 더 몰입하게 된다. 단순히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에서 발현된 취재가 진행되는 동안 그동안 묵인해 온 이 사건에 대해 많은 이들이 알아야만 하는 일이라는 걸 자각하게 되면서 더욱 필사적으로 사라의 행방을 추적하던 줄리아의 모습을 통해 역사 속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와 우리들이 기억을 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자신의 안온한 생활이 파괴될지도 모를 위험에서도 진실을 향해 다가서는 그녀의 모습은 소시민으로 귀 닫고 살아가며 내 안위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나의 나태함을 고요히 일깨운다.
생명은 생명으로 이어진다. 쉬르카라 불리던 어린 소녀의 삶이 바뀌던 날, 사라 스타르진스키로 벽장 속에 갇혀버린 남동생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야만 했던 여인의 이름은 다시 줄리아의 어린 딸에게로 이어진다. 기억을 해야만 했던 그녀는 자신이 찾아낸 진실로 삶이 흔들리는 이들을 보듬어 안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촘촘히 짜인 역사 속 사건의 틀 속에, 묻혀버린 개개인의 이야기를 유려하고 아름다운 필체로 전하는 작가를 통해 깊은 감동을 받은 책, <사라의 열쇠>. 10년 만에 다시 읽는다.
내 상처는 절대 아물지 않을 거야.
내 아들이 날 용서해 줬으면 좋겠구나.
그 아이는 절대 모를 거야.
아무도 절대 모를 거야.
Zakhor, Al Tichkah
기억할지어다, 절대 잊지 말지어다.
- 사라의 열쇠, p.398
누구도 어린 그녀에게 제대로 이야기해 주지 않았던 세상의 부조리 속에서 살아내야만 했던 사라. 그녀와 같은 이들을 'Sheerit Hapletah'라 부른다. 살아남은 자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삶을 살아야만 했던 이들. 그들을 위해 잠시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