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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Feb 13. 2024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얻고 싶었던 것을 얻었고 가고 싶었던 곳을 찾아가는 지금, 나는 그토록 갈망했던, 제 한 몸을 불살랐으나 결국 얻지 못하고 찾지 못한 채 중원에 묻힌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을 대신해 조국에 가서 보고해야만 한다.

싸웠노라고, 조국을 위해 싸웠노라고. 나는 아들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말해주었다.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조국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 정정화 여사의 회고록,

                                <<장강일기>> 중에서






제주 올레길 초입의 한반도 지도 모형의 숲길입니다





 허난설헌을 주제로 한 설치미술 작품을 만든 작가분이 있습니다. 독특했던 미술 작품과 주제를 선택하고 매달리는 작가의 마음에 대한 인터뷰 글귀가 인상적인 윤석남 작가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그리며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후에 허난설헌을 주제로 묵은 너와나무의 결을 이용해 독특한 폐목시리즈를 완성해 마치 올무에 매인 여린 생명처럼 힘겨운 날들을 살아가던 당시 여인들의 삶을 표현해 냈습니다.




재능이나 발언을 억누른 채 살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여성들의 삶을 현재로 소환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아직도 수없이 많은 여성의 삶을 캐내어 표현하고 싶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에 천착하면 여성작가 본인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윤석남 작가는 초상화에 몰두하고 있다고 합니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고 서양화에서 동양화 화법을 시도하며 전향한 뒤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큰 공헌을 한 여인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1939년 중국 만주에서 태어나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 낸 작가의 손 끝에서 완성되는 여인들의 초상은 어떤 색과 선들로 완성되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화로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한겨레출판)의 책의 출간과 학고재에서 열리는 전시 2개로 동시에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전시는 2021년도 일입니다) <심장>이란 제목의 전시에서는 붕 떠 있는 톡톡한 질감의 분홍색 하트를 통해 "여인은 부모의 집도, 남편의 집도, 아들의 집도 자기 집일 수 없는 신세"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삶에 매몰되어 가는 여인들의 정서를 대변했었죠.



 하지만 이제 그녀는 김이경 소설가가 쓴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란 책 속 그림을 통해 우리 앞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여인들을 환원시켜 줍니다. 우리가 잊어버린,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여인들이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살아갈 또 하나의 나침반을 제시합니다.


 


약눈이 오름의 좁고 긴 길, 오늘 어떤 길을 걸으셨나요?







어떤 시대를 살아갔느냐?


외부적 요인에 의해 개인의 삶이 많이 좌우될 수 있다는 걸 전제로 한 질문이겠죠. 누군가가 살아간 시간들을 더듬어 볼 때 제일 먼저 하게 되는 질문이지 않을까요? 선택지가 극히 드물었던 우리네 여인들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14인의 여성들이 살아간 시간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와 여성인권에 대한 개념이 전무한 유교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있는 조선 후기라는 점입니다. 책에 등장한 한분께서 덤덤히 남긴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독립운동을 같이 한 남편분이 자신이 글을 써서 신문사에 투고를 하면 '여자가 무슨 그런 걸 쓰냐'라고 물었다더군요. 그런 시대였어요. 이분들이 살아낸 시대는 남편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몹시도 두렵고 떨리는, 소박맞을 각오를 하고 해야만 하는 일들이었죠. 지금처럼 SNS가 발달된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신다면 어떤 말씀을 할까요? 제가 요즘 유튜브에서 열일하고 있는 그녀, 제재와 같은 인터뷰어가 돼서 이분들을 만나보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잠시요.







"너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14인의 여성독립운동가의 채색 초상화를 보고 있으면 크고 또렷하게 확대된 눈동자와 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녀들의 눈, 흔들림 없이 또렷하고 올곧은, 머루보다 검은 눈동자가 제게 묻습니다.



윤석남 작가는 작은 사이즈로 얼굴을 먼저 그리고 그다음 인물의 특성들을 참고해서 세세한 드로잉을 마친 다음에야 원본 사이즈를 한지에 옮겨 그린 뒤 채색을 한다고 합니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중간, 그 경계를 허무는 멋진 시도로 만나게 되는 여인들의 초상이라 그런지 모두 다 강렬합니다. 그리고 김이경 작가의 글 속에 등장하는


김마리아 - 너는 영웅이다

강주룡 - 을밀대에서 외치다

정정화 - 담대한 여인

박진홍 - 천재, 혁명을 꿈꾸다

박자혜 - 과격한 간호사

김옥련 - 성난 파도로 일어서다

정칠성 - 잊힌 혁명가를 찾아서

남자현 - 혈서

안경신 - 제국을 향해 폭탄을 던지다

김알렉산드라 - 시베리아의 붉은 전설

권기옥 - 조국을 위해 날다

김명시 - 장군을 위하여

박차정 - 펜 대신 총을 들고

이화림 - 춘실, 동해, 화림. 세 이름을 살다



 여러분들은 이 중 몇 명의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잊고 살아왔습니다. 3월 1일,

이 날이 어떤 날이었는지를요. '말말말'들로 왜곡된 이 날의 의미를 뜻깊은 책과 도전적인 채색초상화 작품들로 다시 새겨봅니다.








이제 이 길을 완성하는 건 여러분의 몫이자 선택이겠죠.







꿈을 밀고 가는 힘은

이성이 아니라, 희망이며,
 
두뇌가 아니라 심장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했죠. 세상 어떤 존재보다 더 뜨거운 심장을 가졌던 그녀들이 만들어준 지금의 세상에 감사하며 직접 초상을 마주하고 인사를 건네봅니다. 정말 조용한 목소리로, 마음 다해 감사하다고 말하면서요.   









#윤석남작가

#김이경소설












* 같이 듣고 싶은 곡


Tones and I : Dance Monkey


https://youtu.be/hGDU64P4sKU?si=D_7GTDYItcaNFfH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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