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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Feb 27. 2024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보령 해안도로길 잠수교 근처에는 천년사찰 왕대사가 있습니다. 봄이면 벚꽃이 장관인 이곳은 산중턱에 있어 주차장에서 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야 조그만 대웅전 마당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찰의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서해안 고속도로와 모든 구부러진 논길들, 바닷물이 들고나는 갯벌을 눈에 담고 있으면 마음속 깊은 곳까지 개운하게 정화되는 느낌이 듭니다. 내려오는 길에 해안도로 매운탕과 강개미 맛집으로 소문난 <숙이네 맛집> 또는 담백한 산나물 정식으로 이름난 <산에>에 들러 밥 한 끼 먹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한나절을 보낼 수 있죠. (단 2인분 이상 주문을 해야 가능하니 남은 거 싸 오더라도 먹고 말겠단 각오로 가셔야 한다는 점 유의 바랍니다.)

 


 짧은 나들이 말고도 스스로를 정화하는 방법으로 7년 가까이 배워 온 플루트를 꺼내 분다거나 사진을 찍으러 달려간다거나, 좋은 전시를 본다거나, 틈나는 대로 책 속으로 도망가고 때로는 땀이 흠뻑 베어나도록 운동을 한다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내면을 관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여기까지 읽는다면 의아한 표정과 더불어 "뭐야, 얘는? 잘난 척하는 거야?"라며 창을 닫으려 할지도 모릅니다. (한국인의 급한 성미에 대해 평소 우려를 표하는 1인 중의 한 명인 저 간곡히 부탁드리오니 잠시 기다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란 말이죠.)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를 다독이고 끌어올리려고 해도 3년 전 번아웃증후군 판정을 받고 상담과 약물치료도 병행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를 보면 '밝아서, 뭐든 열심히 해서, 못한다고 안 해서'라는 말을 하며 자기 일 열심히 하고 잘 사는 사람이라 평가를 하죠. 실제로 그런 평가를 받기 위해 잔잔한 수면 위 고아한 모습과는 달리 죽어라 발길질하는 백조처럼 스스로를 다그치며 살았죠. 



 러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왜 이렇게 끊임없이 일만 하고 사는가? 내가 바라는 내일은 무엇인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몇 년씩 정성으로 가르치던 아이들이 둥지를 떠나버리면 마음속에 생겨나던 구멍, 빈 둥지 증후군인 듯 허망한 마음을 달래지 못했죠. 스스로의 질문에 며칠 동안 답을 내지 못하고 어둠이 산등성이 뒤로 물러나 다시 밤을 기다리는 아침까지 한참을 서성이며 깨어 시간들이었습니다.



 일상이 무력해지고 지루해지고 견딜 수 없을 만큼 따분해졌니다. 주어진 일은 모두 소화해 내지만 전처럼 기쁘거나 만족을 준다거나 이런 내적동기가 사라지고 나니 그다음의 일을 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받게 된 치료였습니다. 근본적 치료법은 마음이 바뀌는 일이라지만 그 마음을 지배하는 생각이 바뀌는 일은 천지가 개벽해야 할 만큼 쉽지 않죠. 그래서 매달렸습니다. 읽고 쓰고, 다시 들여다보는  일을 통해 생각을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런 생각에 힘을 더해주고 다시 일어설 동기를 부여해 준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저)이란 책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2018년 산문집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란 책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분이죠. 작가의 또 다른 신작에서는 그 죽음을 가까이 바라보며 내 인생에 스며드는 허무란 감정의 실체를 굳이 걷어내기 위해 애쓰지 말고 인정한 뒤 달래는 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마라.

                               - 김수영, 봄밤 중




 소시민적 삶과 의식에 '폭포'처럼 서늘한, '기침'소리처럼 단호한 채근으로 각성을 요구하던 김수영 시인이 쓴 사뭇 다른 어조의 시 한 편으로 서문을 시작합니다. 애쓰지 말라고 합니다. 얼마나 살뜰한 위로던지요.



 1. 허무의 물결 속에서

 2. 부, 명예, 미모의 행방

 3. 시간 속의 필멸자

 4. 오래 살아 신선이 된다는 것

 5. 하루하루의 나날들

 6. 관점의 문제

 7. 허무와 정치

 8. 인생을 즐긴다는 것

 


  

 허무의 물결 속에선 히로시 스기모토의 바다 사진에 대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새도, 사람도 어떤 생명도 존재하지 않는 광막한 바다와 하늘의 경계선이 된 수평선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없기에 바라보는 이가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부재 혹은 없음을 통해 비로소 인식이 되는 존재의 의미. 그 아이러니를 통해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며 시작는 책은 그림, 영화, 책, 사진 등등 다양한 소재들이 연결고리가 되어 읽는 이의 일상 속 경험과 생각을 날카롭게 벼리고 깨웁니다. 여러 챕터들이 모두 흥미로웠지만 제게 특히 더 와닿았던 부분은 5번 하루하루의 나날들이었습니다.






 아침 9시에 시작해 밤 12시에 끝나는 노동의 시간 속에 내가 하는 일의 의미와 보람을 스스로 부여해 오며 버티던 날들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던 때에 책을 펼쳤기에 이 부분에서 큰 위로를 받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시시포스의 신화로 시작되는 챕터에서는 얀 라위컨이라는 판화 삽화가의 그림이 등장합니다. 끊임없이 바위를 언덕 위로 올려야만 하는 벌을 받은 시시포스는 그림의 단골소재죠. 불끈대는 근육과 엄청난 크기의 바위를 등에이고 비탈길을 오르는 그는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존재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가 되었는데 얀 라위컨은 일상적 묘사와 달리 복수의 인간이 등장해 바위를 밀어 올릴 때 그들의 고된 노역과는 반대인 그늘 아래 휴식을 취하는 이들과 한가로운 사람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화면 안에 배치합니다. 그리고 바위를 밀어 올리던 중 손에서 빠져나가 아래로 굴러가버리는 허망하기 그지없는 순간도 그렸는데 떨어진 바위를 다시 올리기 위해 원점으로 돌아와야 하는 인간의 모습까지 초점을 맞춘 이 그림에 매료되었죠. 일이 사라진 인간에게 닥칠 필연적 권태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하던 일이 어그러지는 순간의 허무에 대해서도요.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시간은 실로 공포스럽다. 미국의 싱어 송 라이터, 패티 스미스가 말한 대로 우리는 그냥 살기만 할 수는 없기에 무엇인가 해야 한다. 공허한 시간의 검은 입이 당신을 삼키기 전에 일을 해야 한다.

                                           -  p.157




꿈속에서 울다가 아침이 되어 깨어나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해야 할 일이 놓여 있을 것이다. 누군가 시킨 일이기에 자발성을 느낄 수 없는 일,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마지못해 해야 하는 일, 인생을 파멸의 구덩이로 밀어 넣지 않기 위해 하지 않을 수 없는 일, 의미도 즐거움도 없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 아름답지 않은 일들이 우리 앞에 길게 놓여 있을 것이다. 이 길에 끝이 있기나 할까. 목표로 할 것은 이 하기 싫은 일을 해치우고 보상으로 받을 여가가 아니다. 구원은 비천하고 무의미한 노동을 즐길 만한 노동으로 만드는 데서 올 것이다.    

                                   - p.160






 제가 하는 일을 되돌아봅니다. 고통스러운 바위 굴리기가 아닌 정상을 향한 묵묵한 걸음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찾아야겠다 생각합니다. 요즘 최우선 입학순위인 의예과 입학을 위해 아이들 성적을 올려 그들의 등급 향상을 위해 매진하는 일 전부가 될 수 없기에 엇을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여기서 찾았습니다.






목적 없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다. 내가 너무 지나친 궁핍에 내몰린다면, 생존이 삶의 목적이 되겠지. 그렇게 되지 말기를 기원한다. 내가 너무 타인의 인정에 목마르다면, 타인의 인정을 얻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겠지. 그렇게 되지 말기를 기원한다. (중략) 사람마다 다양한 재능이 있다. 혹자는 살아남는 데 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척하는 데 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데 일가견이 있다. 잘 사는 사람은 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삶을 원한다. 산책보다 더 나은 게 있는 삶은 사양하겠다. 산책은 다름 아닌 존재의 휴가이니까.
                                    - p.293


 


  다이아몬드는 D등급이 가장 반짝인다고 합니다. 깊은 땅 속 어둠 속에 잠들어 높은 열과 압력, 지각 변동을 이겨내며 응축된 시간이 모든 이들이 열망하는 빛으로 탄생하죠. 인간들의 시선에 열망을 부여하는 보석의 등급은 우리가 세상에 제시해 둔 등급과 반대입니다. 세상의 요구에 맞추어 1등급의 벼랑으로 아이들을 몰고 가며 스스로 허탈해지던 마음을 내려놓고 D등급의 다듬지 않은 원석을 찾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커팅하느냐에 따라 밝기가 달라지는 보석 같은 아이들과 그 밝기를 제대로 보는 눈을 가진 자가 되어 스스로 빛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것이 노동을 즐거움으로 바꾸며 꼭대기까지 바위를 밀어 올릴 수 있는 저의 허무를 극복하는 작은 발판이 되어 준 이 책에서 여러분은 어떤 장을 제일 오래 펼쳐보실지 궁금합니다.



 마지막 장을 덮으신 뒤에는 사목사목 긴 산책을 마친 이의 노곤함을 기분 좋게 누리시며 반짝이는 황금나무 아래 행복한 단꿈을 꾸시길요. 꼭이요.




















* 같이 듣고 싶은 곡


정재형 : Waltz for Emptiness


https://youtu.be/WHYi2ePtWnk?si=fAMQljkAMpcSrNx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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