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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Mar 05. 2024

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 문학동네







날아올라야 보이는 풍경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달을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 기다려온 것만 같았다. 이 회색 지대를 부유하면서 어떤 미래가 올 지 모르는 채로 모든 결과를 조마조마 걱정하고, 혼자 있는 순간에는 요즘 우리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어떤 느낌을 견디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엄청나게 허약하며, 갑작스럽고 불가해한 방식으로 우리를 배반할 수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때 나는 스튜디오로 조금 더 가까이, 하지만 내털리는 나를 볼 수 없을 만큼만 가까이 다가갔다. 맨발 아래 시원한 땅이, 등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느껴졌다. 마당에 짙은 어둠이 깔려 강렬하게 빛나는 스튜디오의 조명 외에는 온통 캄캄했다. 나는 더 다가갔다. 내털리가 머리를 앞으로 기울이며 어깨를 늘어뜨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손을 흔들거나 이름을 부르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내털리가 나를 볼지, 이번 한 번만이라도 문으로 다가와 나를 안으로 들여줄지.
                                                                                                      - <첼로>, p92-93







 하늘이 뿌옇다. 꽃샘추위가 몰고 온 북서풍의 입김이 걷어내던 먼지들이 정체된 채 시야를 가린다. 어제보다 더 농밀해진 먼지들은 밤새 어둠 속에 고여있다 풀려나 부니처럼 느릿하게 움직인다. 창문 너머 세상을 바라보다 다시 손에 든 책으로 눈을 돌린다. 시간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독특한 작가, 앤드루 포터의 신작 <사라진 것들>의 마지막 장을 넘긴 뒤 가만히 숨을 내쉰다. 열다섯 편의 단편 소설들에서 들려오던 각각의 목소리들이 귓가에 남는다. 사십 대 남성 화자의 일인칭 서술들로만 이루어진 독특한 단편들에 담겨 있던 불안, 허무, 자신이 선택한 삶을 위해 묻어두었던 자유와 꿈, 젊은 날의 활기에 대한 희미한 열망 등이 내가 앉은자리에 가득 쌓여있다. 에바 캐시디의 목소리로 듣는 Autumn leaves의 노랫말들이 활자가 되어 후드득 내려앉아 있는 기분이랄까?






눈을 들어야 만나는 풍경들이 있습니다









 소설을 읽고, 나 또한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동안 현재형의 서술이 좋을지 과거형의 서술이 좋을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다. 전달하는 입장에서 쓰기 편한 것과 읽는 이의 입장에서 읽기 편한 것에 대한 절충으로 두 시점을 혼재해 사용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과거형의 서술로 이루어진 소설을 접하는 것은 매우 생소하고 낯선 경험이다. 마치 잘 지어진 투명한 유리 온실 안에 내가 들어가 내게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만 반응하며 몸 안에 움트는 봄눈을 틔우기 위해 숨죽여 기다리는 것처럼 외부와 단절이 된 채 이 소설만 들여다보게 만든다.



 지금의 화자가 과거의 자신을 돌이켜 보며 이야기하는 동안 그의 지금이 살아오는 동안 잘라낸 수많은 가지들로 얼마나 외롭고 헐벗은 나무가 되어버린 상태인지를 직시하게 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저 평생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젊은 날의 치기와 열정들이 만들어 낸 눈부신 날들이 어떻게 될지 몰랐기에 지금이 더 서글퍼지는 화자의 심리가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가족의 안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오스틴은 매일 육아서적을 읽고, 아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갑작스러운 질병등을 파악하며 아들을 살피지만 정작 수영장에서 튜브로 된 매트 위에서 편안히 누워있던 아들이 갑작스레 물에 빠졌을 때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공황상태가 되어 서 있는다. 그 일로 그는 "유령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나 가는 현실"에 잠긴 <히메나> 속 남자 주인공처럼 아들에게 외면당하며 거부당하는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뭔가 놓치고 있다거나 뒤처지고 있다"라고 느끼거나 "인생을 있는 그대로 즐기고 있다고" 느끼거나 이 두 부류의 화자들은 소설 속 끊임없이 교차하며 자신들의 삶에 대해 서술한다. 이들이 누렸던 젊음은 "저녁의 끝은 늘 함께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거나 소파 위에서 서로를 꽉 끌어안고 뒤엉킨 몸으로 맞이하던" 연인과의 밝은 미래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달콤하게 그려지던 날들이다. 하지만 현실 속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의 오늘을 지나간 시간의 화법으로 말하는 화자에게 그를 아는 주변인들은 한 번씩 묻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너 어디로 간 거야?"  

                                                                       <오스틴> p.24



갑작스레, 뛰어들어 온 차의 헤드라이트에 놀란 고라니처럼 눈을 든 화자들은 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둥지로 숨어버린다. 안전하고 어두운 고치와 같은 자신의 공간으로 숨어든 때에야 대답을 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라인벡>, p127


 
 내가 말했다.
"가끔은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매달려 너무 애쓰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 알아? 그걸 놓아버리기가 너무 힘들어."
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 넌 그다지 다르지 않아." 칼리가 말했다.
"우리 둘 다 그래."
"더 성공한 사람으로 변하지 않은 건 확실하지." 나는 말했다. "혹은 현명한 사람으로."
"맞아." 칼리가 말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런 얘기는 아니야. 성공이니 뭐니 그런 건 사실 중요하지 않아."
칼리가 내 손을 꽉 움켜쥐고 술잔을 들어 길게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네가 예전과 그렇게 다르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나는 말했다.
"어쩌면 참을성이 더 많아졌겠지.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는 확실히 낮아졌고."
"자신에게 더 관대해졌다고 생각해?"
"아니." 나는 말했다.
"그냥 기대가 낮아진 것뿐이야."                
                                                                                 - <히메나>, p.288







침묵해야 들리는 말들처럼 이 소설이 그렇습니다





 아름답지 않다. 려하지도 않다. 그런데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오랜 시간이 지나 자신에 대한 평가를 내린 주인공의 한마디가 "스스로에게 기대가 낮아진 것"이라니. 치열하게 경쟁하고 자신을 몰아치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배우고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에서 그런 매일에 지쳐버린 우리들의 자화상 같다. 이 책은 소설 속의 또 다른 부록으로 이어지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여성 화자가 되어 나의 이야기를 하나 꺼내놓도록 노트를 펼치게 만든다.



 쓰고 지우다 다시 조그맣게 흘려 쓰는 이름들과 었던 날들의 파편들이 연필 끝에서 쏟아져 나온다. 파편을 주워 모아 입 속에 넣는다. 노래가 되어 흐르는 순간을 만나기 위해. 소설을 읽는 이유는 어쩌면 내 안에 멈춰진 노래가 다시 흐르게 만들기 위함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앤드루 포터의 신작, 세상을 알아버린 인물들의 씁쓸한 고백들이 마음을 울리는 이 책. 조용히 가방에 넣는다. 조금 더 오래 옆에 두고 싶다. 사라진 것들을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닌 앞으로 내가 만나야 할 것들을 바라보는 눈을 기르고, 마음을 열어두기 위해 필요한 문장들을 곱씹기 위해서.  






색이 사라져야 보이는 형체들이 좋습니다

























* 같이 듣고 싶은




에바 캐시디 : Autumn Leaves


https://youtu.be/XTkUplF5VIE?si=HcubH8D_KnPkL8pA







                                             

이쁜 하루 되세요. 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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