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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Mar 19. 2024

구름해석전문가

부희령 - 교유서가







간과하기 쉬운 아름다움에 눈을 뜨는 방법이 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이것을 예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 그리고 이것을 두 번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면?

   - 레이첼 카슨, <자연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1956)






 하늘을 올려다본다. 미래 신인류의 새로운 체형이 될 거라는 거북목을 탈피하기 위한 시도는 오래전, 하늘에 대한 순수한 경외감이 가득했던 어린 날의 기억 속으로 나를 이끈다. 적운형의 다채롭고 두터운 구름결 위로 필레우스를 닮은 삿갓구름을 덧입혀본다. 지금 저 이는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최후 승자가 되어 황제에게 필레우스를 하사 받았다. 노예 신세에서 해방된 노예에게 주는 모자는 험로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표식이 된다.


 또 다른 구름에선 발칙한 인간 악시온이 끌어안은 헤라의 아름다운 등줄기가 보인다. 감히 신들의 만찬에서 제우스의 아내 헤라를 탐냈던 겁 없는 욕망의 결정체 악시온. 제우스는 구름의 여신 네펠레를 헤라로 변신시켜 악시온에게 보낸다. 헤라와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믿은 그는 헤라를 정복했노라 자랑하고 다니는데 혼자만의 운우지락을 누린 대가로 타르타로스에 갇혀 불튀는 수레바퀴에 묶인 채 빙빙 도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다. 그때 태어난 켄타우로스들은 무엇 때문에 반인반마가 되었을까? 설산에 걸린 구름들을 보니 악시온으로 인해 태어난 그들의 지닌 원죄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스위스의 물리학자이자 등반가인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는 시안계 cyanometer를 발명했다. 하늘의 푸름을 조사하는 데 사용할 목적으로 감청색 물감과 검정 물감을 각각 다른 비율로 섞어 종이에 칠한 뒤 숫자를 표시한 53가지 카드를 원형으로 배열해 이 원을 눈에서 표준거리만큼 떨어트려 하늘을 바라보게 했다. 하늘의 색이 대기에 들어있는 물방울과 얼음 결정에 좌우된다는 그의 말은 대기의 색을 이해하는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오늘의 하늘빛과 구름결은 그가 만든 시안계를 통해 보면 몇 번이나 될까? 오다 만 봄비가 주춤대며 공중에 서 있는 걸 올려다보고 있는 기분이다. (어서 오렴. 단비가 되어 내려주지 않으련?)











 올려다 보고, 가늠해 보고, 측정해 보고, 기록해 보고.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무형의 푸름, 온전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늘에 대해 알려면 적당한 거리로 떨어져서 바라보아야 가능한 일이다. 호기심의 원천인 하늘도 이렇게 바라보는데 우리들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만나는 관계들을 이렇게 바라본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


 이번 책은 <구름해석전문가>, 부희령의 소설집이다. 제목 덕분에 오래간만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에 관련된 긴 이야기를 서두에서 하게 되었다. 동백의 꽃물이 퍼져나가는 듯한 형체를 오래된 포크로 콕 찍고 있는 녹빛의 표지가 시선을 끄는 이 책 속에는 6편의 단편소설들이 서로 짝을 이루어 육각형의 단단한 고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토성의 두터운 구름띠를 보는 기분이다. 토성의 가장 안쪽 중심부에는 가스와 수증기, 얼음결정들이 만들어 낸 분명 허상일 텐데 견고한 육각형의 모양의 구름이 자리해 있는데 책을 다 읽고 난 뒤 내 눈앞에도 꼭 닮은 문양이 펼쳐진다. 도형의 가장 안쪽에는 도형의 각각의 변을 바라보고 해독하는 독자인 우리가 앉아있고, 천천히 돌아가는 면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별을 대처하는, 집이란 공간이 갖고 있는,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알아가는 자신들에 대해 나직하게 말을 건넨다.






 
돌아오는 길에 이경은 걸음을 멈추었다. 선우의 일들이 떠올랐다. 전생처럼 아득했다. 며칠 동안 선우의 메시지나 sns 계정을 확인하지 못했으나,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이경은 왜 자신이 그토록 선우와 선우의 삶에 집착했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원래 알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경은 자신을 나무라는 심정이 되었다. 선우가 쓴 선우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경이 쓴 이경의 이야기를 읽고 싶었어야 했다고. 그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을 바라보아야 했다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경은 안개라고 여기던 희뿌연 덩어리들이 구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경은 달빛과 뒤섞인 구름 속에 서 있었다.

 산을 보려면 구름 아래에 있어서도 안 되고, 구름 속에 있어서도 안 되고, 구름 위에 있어야 해요. 기댈 데 없이 허술한 상운의 말이 떠올랐다. 이경은 어둠 속에서 혼자 웃었다. 내일은 만년설을 볼 수 있을까. 내일이 아니더라도 포카라를 떠나기 전 언젠가는 보겠지. 이경은 젖은 풀잎을 헤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 구름해석전문가, p.59










 사랑한다 믿었던 이가 소설을 쓰겠다는 자신에게 어떤 이별의 말이나 제대로 된 변명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쓰던 노트북 하나를 건네주며 써보라고 말한 뒤 곁을 떠나간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여자를 더욱 그에게 집착하게 만들었고, 감정의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여자는 네팔의 포카라로 도망치듯 떠나온다. 그곳에서 깨닫는다.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이 얼마나 헛된 것들이었는지. 멀리서 바라보니 보이는 덧없는 관계의 종말. 자신이 느끼던 고통의 무게를 벗고 나니 아득한 전생과 같다는 말을 하는 이경. 그제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이별에 대해 배운 그녀가 다시 딛는 발 끝은 단단하게 다져진, 지구의 시간을 오래 입고 버텨 온 산길이다. 그 길을 걸으며 그녀는 자신을 되찾는다.





 너와 나는 서로의 옛집에 가보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어느 먼 곳의 정류장에 내려서 길고 구불구불한 어린 시절의 골목으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골목을 지나 각자의 옛집을 통과하고 나면 원래의 너와 원래의 나로 돌아가, 우리의 새로운 집으로 함께 가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 귀가, p.142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 누군가를 뒤따라간다. 아니. 누군가가 내 뒤를 따라가고 있다. 그래. 나는 누군가를 피해 달아나고 있다. 아니. 누군가가 나를 피해 달아나고 있다. 그래. 나는 내 얼굴을 보려고 달아나고 있다. 나는 내 얼굴을 보기 위해 나를 피해 달아나고 있다. 아니. 나는 내 얼굴을 보려고 셔터를 내리지 않은 누군가를 향해 가고 있다. 그토록 불빛을 찾아 헤매는 건 내가 누군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유리창에라도 얼굴을 비춰보고 싶다. 얼굴을 보면 내가 누군지 알 수 있을 테다.       - 귀가, p152









 6편의 소설들은 모든 견고한 것들이 먼지처럼 흩어지고, 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미몽의 상태에 놓인 풍경을 거닐고 있는 인간의 심리상태를 면밀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그 속의 인물들이 이별을 마주하는 자세에 대해 서술한다. 고산병에 걸리고 탈진할 것만 같은 극한의 피로 속에서 묵묵히 산에 오르는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깨달음을 찾아가는 수행의 과정을 겪고 있는 수행자이자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사막의 오아시스 건너편 안온한 휴식처와 같은 집 한 채를 발견하고 안심하고 휴식을 취하던 승문은 잠에 빠졌다가 밤의 추위와 들짐승을 피하기 위해 그곳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그 집은 앞면의 창과 벽 한쪽만 세워진 미완성의 공간이었고 실체를 발견한 그는 자신의 인생 전체가 이 집과 닮았다는 생각과 함께 먼 이국의 승려가 되기로 결심하고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승문의 아내였던 금희는 충동적으로 떠나온 네팔의 포카라에서 쿠마리들이 신전에서 내려와 새 삶을 살아가는 터전을 거쳐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그가 보았던 오아시스를 찾아 나선다. 오랜 시간이 지나 찾은 그곳에서 완성된 집을 보게 된 금희는 하나의 허상으로 인생의 행로가 바뀐 그를 부르며 자신과의 기억 속의 그와도 이별을 한다. 타루초를 흔드는 바람이 자신의 업도 흩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주 선 풍경들을 오래도록 마주하는 금희의 모습은 자못 성스럽기까지 하다.



 소년과 소녀의 성장소설의 정석 같은 아껴두고 싶은 첫 번째 소설 "콘도르는 날아가고"부터 "내 가슴은 돌처럼 차갑고 단단하다"까지. 주인공들이 각자의 사랑에 대해 헤어질 결심을 하는 순간들에 대한 기록을 마주하며 내 기억 속 아직 이별하지 못한 이들에게도 고요히 안녕을 고한다. 이경이 다시 발을 딛는 산 길 위에 놓여있던 누가 놓았는지 모르지만 선의로 놓아둔 단단한 반석을 만드는 돌들, 그 돌들을 닮은 인연들이 만들어 낸 발자국이 소설을 읽고 난 나의 마음 길 위자리한다. 서툰 걸음으로 비틀거리며 걷던 순간들이 소설을 읽으며 마음의 위로를 얻고, 같이 걷거나 앞뒤로 걷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이고 싶게 만드는 아름다운 소설을 당신 앞에 펼쳐본다.










* 같이 듣고 싶은 앨범


에피톤 프로젝트 : 寄着


https://youtu.be/D_fiwyPgX2Q?si=m5lvDG27e53Fairw














#부희령

#구름해석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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