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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Sep 17. 2024

음악소설집

김애란 외 4인





 앨범을 펼치듯 머릿속 한 장면을 떠올릴 때면 시각적 이미지들은 흐릿해져 군데군데 지워져 있죠. 사랑한 이들의 얼굴조차 말이죠. 시간이 지나도 선명한 것은 청각으로 기록된 것들입니다.


 욕실벽타일에 맺혀있다 느리게 떨어지던 물방울의 마찰음, 멀리서 울리던 교회 종소리, 포르테시모로 몰아치던 바람소리, 결을 알 수 없어 두렵던 여름의 폭우. 그리고 툭 튀어나오는 분절된 음악 소리. 앞이 생각나지 않는 노랫말들. 이모의 탈상을 마치고 화면 가운데 새겨지던 엔딩크레디트의 글자들과 함께 흘러나오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메인 테마, 어설픈 첫사랑의 두근거림보다 더 신났던 알라딘의 지니가 부르던 노래까지. 청각으로 기록된 시간들은 흐려지지 않아요. 그래서일까요? 프란츠의 <음악소설집>을 본 순간 강렬한 끌림을 느꼈죠. 우윳빛 표지 안쪽을 가득 채운 음영의 나뭇잎까지 이 소설은 오감을 만족시켰죠.


 5명의 작가가 음악이라는 같은 주제를 놓고 자신들의 창작물을 보여줍니다. 김애란, 김연수, 윤성희, 은희경, 편혜영. 5색의 악보가 다양한 빠르기와 흐름으로 제게 속삭였죠. 네 삶의 박자와 빠르기는 어떤 모양의 아르페지오로 마디를 채우고 있느냐면서요.




 그중 김연수 작가의 <수면 위로>를 여러분들 앞에 펼쳐 봅니다.

 


몇 번이고 이 동영상을 되돌려보고 나서야 저는 알아차렸습니다. 이분의 말은 바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을. 어떤 시간여행자가 과거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면, 거기에 자신이 놓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물이 날 정도로 인생이 뻔하고 지긋지긋하다면, 같은 하루를 몇 번이고 다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우리는 뭘 해야만 할까요?

 찾기 위해서죠. 지금 이 순간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지금 여기에서 그걸 찾아야 해요. 그게 내가 기시감, 신맛, 자살 충동을 느끼는 이유에 대한 나의 가설입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몇 번이나 이 하루를 다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ㅡ 수면 위로, p 79 중





 사랑하는 연인 기진이 죽고 홀로 남겨진 여주인공에게 갑작스러운 공황장애가 찾아오죠. 다양한 노력 끝에 유투버 유주의 영상에서 나온 나무 안에 흔들리지 않은 나뭇가지 찾기 방법으로 그녀는 숨 쉬는 일에 대한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영상 속에 낡은 중국집 가게 안에서 오므라이스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신의 연인 기진의 모습을 발견하죠. 불우한 자신의 가정사로 세상에 마음을 잘 열지 않던 언제나 어디로든 훌쩍 떠나버릴 것 같던 기진.


자신의 곁에서 사라진 그가 생생하게 담겨있는 영상 속에서 그녀는 다시 숨 쉬는 방법을 찾으며 일어니다. 기억 속에 영원히 박제된 어느 날의 밤, 오래 걷던 골목에 쏟아지던 달빛을 맞으며 걷는 그들 어깨 위로 드뷔시의 달빛이 흘러요. 윤곽을 따라 발 밑에 고여 드는 음악이 이렇게 또 한 번 청각에 새겨지는 순간이죠. 녀는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쉬는 법을, 온전히 체득하게 될까요? 궁금하시죠?












 은희경의 소설 웨더링은 구스타브 홀스트의 "행성"이라는 곡을 두고 기차 안 4인의 여행객의 이야기를 펼쳐 보입니다. 가장 흥미로웠어요. 예기치 못한 순간. 같은 목적지를 향해 서로 다른 이유로 달려가는 이들의 우연한 만남이 처음 그 곡을 작곡한 구스타브 홀스트의 기차 여행을 보여주며 시작하죠. 접점이 없던 인물들이 각자의 삶을 이야기하는 플롯이 이렇게 흥미롭게 다가오는 건 근래 처음인 듯요.



 클래식 음악회 해설가이자 사회자로 참석하는 기욱의 관찰자 시점이 인선, 준희, 악보를 펼친 노인을 보여줍니다. 대중을 위한 소비재가 된 음악공연들 사이 진정한 예술에 대해 목말라하는 그에게 구스타브 홀스트의 행성 악보를 펼쳐든 노인은 학창 시절 자신을 가르친 음악선생님을 떠올리게 만드죠.


 언어도 마찬가지야. 사용할 당시에만 맞는 말이고 결국은 변하게 돼 있어. 맞았던 답이 틀려지는 거지. 명심해라.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음악뿐이야.
 - 웨더링, p.148
      



 무력한 슬픔을 안고 어린 기욱에게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던 음악교사. 기욱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죠. 요양원에서 수술을 받는 중에도 행성이란 곡을 틀어달라는 형의 요청을 받았다는 노인의 말에 4인석에 같이 앉아있던 준희가 음악을 찾아 재생시키며 어떤 곡인지 독자에게 청자의 인도자가 되어 소설 속 음악으로 이끕니다. 각각의 서사를 갖고 좁은 열차 안 서로의 좌석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이들.

 그들 사이 인선과 옛 연인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박재삼 시인의 시 일부가 인용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별빛처럼 쏟아지는 행성의 음표들을 채우는 물리적 시간 속 우연한 동행자들의 밀도 높은 연결고리들이 만들어내는 화음이 아름다운 소설 속에 폭 잠겨들게 됩니다.


 더운 열기가 가득해도 바람은 달라진 방향을 가리킵니다. 가을이 올듯 말듯 주춤하는 밤. 음악소설집과 함께 여러분들의 마음 속 봉인의 열쇠와 같은 음악 한 곡 재생시키시며 편안한 밤 되시길 기원합니다. 모두, 좋은 밤이요.








* 같이 듣고 싶은 곡



구스타브 홀스트 :


https://youtu.be/3aXsQQ-ueBk?si=VLQyT6ptpMRw_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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