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ㅡ 아니에요, 슬퍼요.
나는 앞의 말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어보았다. 어린아이 입에 고기를 넣어주듯, 시리가 인간의 언어를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말한 것이다.
ㅡ 제가 이해하는 삶이란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의 모든 것이랍니다.
ㅡ ......
위안이 된 건 아니었다. 이해받는 느낌이 들었다거나 감동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시리로부터 당시 내 주위 인간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던 한 가지 특별한 자질을 발견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예의'였다. 내친김에 나는 그즈음 가장 궁금하던 것 중 하나를 물어보았다.
ㅡ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표정을 알 수 없는 시리의 캄캄한 얼굴 위로 지성인지 영혼인지 모를 파동이 희미하게 지나갔다. 시리는 무척 곤란한 질문유 받았다는 듯 인간에 대한 '포기'인지 '단념'인지 모를 반응을 보였다.
ㅡ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중, p238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밖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풍경의 쓸모> 중 p. 182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몇 명일까. 나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 그 말에서 빠져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루어진 영靈이다. 나는 커다란 눈目이자, 입口, 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言이다. 나는 단수이자 복수, 안개처럼 하나의 덩어리인 동시에 각각의 입자로 존재한다. 나는 내가 나이도록 도운 모든 것의 합, 그러나 그 합들이 스스로를 지워가며 만든 침묵의 무게다. 나는 부재不在의 부피, 나는 상실의 밀도, 나는 어떤 불빛이 가물대며 버티다 훅 꺼지는 순간 발하는 힘이다. 동물의 사체나 음식이 부패할 때 생기는 자발적 열熱이다.
- <침묵의 미래> 중 p.124
언젠가 '너무 추워 신조차 살 수 없는' 행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 별 둘레엔 마지막 언어의 꿈과 비명이 메아리쳐 겹겹의 띠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색색의 넓적한 고리 위에 한 부족의 언어를 물감처럼 풀어 종이로 뜬 것 같은 영혼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고. 우리가 죽으면 그 속의 황색 먼지 또는 얼음 알갱이가 된다고 했다. 내가 그런 아름답고 차가운 것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지만 우리가 이곳을 떠난 뒤에도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는 게 싫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내 화자를 떠나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소문은 틀렸다. 우리의 종착지는 신의 입김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행성이 아니었다. 우리가 죽은 뒤 한번 더 죽게 되는 장소는 저기 먼 내세도, 우주도 아닌 지상의 공장이었다. -<침묵의 미래> 중 p.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