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웅
그리운 것은 모두 달에 있다
권대웅
밥 먹으라고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
늦은 밤 골목길을 걸어오던 아버지 휘파람
텅 빈 초등학교 운동장
음악실에서 들려오던 풍금소리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처럼
저 달 속에서 살다가 가을이면
천둥호박이 부풀어 오르는 가을밤이면
두둥실 달의 그리움도 여물어
지상에 외로운 그대 만나러 온다
보따리 가득 머리에 이고
아들집 오는 어머니처럼 다 나누어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달의 마음
둥글어라
풍성한 그 손길에
들꽃들 외롭지 않고
밤하늘 나는 가을새 날개
따뜻하여라
달빛이 마당에 쓰는 편지를 읽는 귀뚜라미
잘 살았느냐
추석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처럼
나뭇가지 위 휘영청 찾아와
그리운 날들 모두 어루만져주고 가는
저 달
하늘색 나무 대문집에서 바라보던.
삶이란 비가 그친 후 거미줄에 매달려 있는 물방울처럼 영롱하면서도 눈부시게 아프고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먹고살아야 하는 그 끈끈함에 사지가 매달려 있지만 이 삶은 너무 숭고하며 반짝이며 아름답다. 그래서 아프다. p. 62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무 아름다운 기억이나 추억도 상처가 된다는 것을 보라를 통해 알았다. 더불어 어떤 상처도 아름다운 진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보라의 바다 너머로 멀리 황금빛 밀밭이 지평선까지 닿아 있다. 라벤더와 밀밭이 만나는 어느 언저리까지 흙담으로 쌓아 올린 오두막이 오도카니 앉아 있다. 그것은 또 다른 명상이다. 평화이다. 눈앞에서 그 풍경이 점점 멀어지고 사라져 간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처럼 이 순간들이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 "다시 와야지." 나도 모르게 그 말들이 나왔다. 아름다웠던 순간, 찰나를 영원으로 포착할 수 없어 인간에게는 그리움이 생기나 보다. 그래서 뒤돌아보고 아련해지고 애틋해지고, 그렇게 그리워져 또다시 찾게 되는가 보다. 이 세상에 당신과 내가 다시 온 것처럼... p.141
모두가 뒤돌아볼 겨를 없이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니다. 사실 모두 시시때때로 뒤를 돌아보며 산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앞날을 볼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기에. 모두 살아온 날들로 가늠해야 하기에 늘 뒤를 돌아보며 산다. 그러면서도 뒤돌아볼 겨를이 없다는 것은 보지 않기 때문이다.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방향으로 앉아 가는 기차 승객처럼 앞은 보지 못하고 뒤만 보고 산다. 그러면서도 매 순간 앞만 생각하기 때문에 광활하고 아름답고 여유롭게 뒤로 펼쳐지는 겨를을 두지 못하는 것이다. 여행은 앞이 아니라 뒤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멀리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먼 뒤로 가는 것이다. 내가 있기에 아주 오래전에도 있었던 저 뒤편 과거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미래란, 앞날이란 늘 미증유未曾有의 불안이어서 아홉 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열 개를 채워야 하기에 없는 것이고,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겨를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p. 224
사랑해. 귓가에 대고 따스한 입김으로 그 밤에 했던 말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사랑했던 그 순간의 강한 파동은 우주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래서 그 주파수로 언젠가 당신에게 다시 온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어졌더라도 사랑은 없어진 것이 아니다. 몸이 없어진 것이지 마음이나 기억, 영혼은 사라지지 않았다. 골목길을 걷다가 문득 뒤돌아보고 싶어질 때, 햇빛 아래 갑자기 눈물이 날 때, 바람도 불지 않는데 나뭇잎이 흔들릴 때, 이 세상을 떠난 사랑이 분자 혹은 에너지로 온 것이다. p. 236
덜 가졌어도 주고 주고 또 주고, 없어도 사주고 사주고 또 사주고, 가능한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면서 나무와 꽃과 새와 바람과 구름을 친구로 사귈 줄 아는 나이, 그런 어른들, 정치인들, 기업인들이 많은 나라일수록 세상은 너그러워지고 여유로워지고 평화로워진다. 추잡스러워지지 말자. 如如해지자. 보는 것, 말하는 것, 먹는 것, 듣는 것, 無心, 無住, 無着, 분별이 없어져 마음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것. 본래가 그렇게 둥글고 환한 것. 그런 어른으로 가자. 집 뒷산에서 꽃들을 보고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p. 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