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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Sep 03. 2024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함정임의 유럽 묘지 기행




어릴 적 제가 가장 좋아하던 은신처는 집 뒤 해망산 양지바른 언덕의 어느 어르신의 무덤이었죠. 동네 유지의 선산이었는지 참 잘 가꾸어져 있었어요. 무덤을 둘러싼 수호수들은 키 작은 향나무들이었고, 바람이 불면 잎들이 흔들리며 뿜어져 나오는 싱그러운 내음이 기분 좋게 일렁이던 곳이었죠. 오래된 소나무들이 많았는데 솔숲은 무성하게 우거져서 작은 산짐승들이 분주히 오가는 모습들이 보이고, 호기심 많은 녀석들이 제 근처까지 와서 빤히 바라보는 걸 느끼며 가만히 앉아있곤 했어요.



 그러면서 생각했죠. 이 분은 살아생전 어떤 좋은 일들을 많이 했기에 돌아가신 지금도 많은 이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누워계신 걸까? 이런 생각이요.

죽음은 하나의 해방이라 생각했거든요. 육체를 벗어나 마음 그 자체로 온전한 자유를 맛보는 순간, 그리고 완벽한 소멸. 하지만 사람들의 내세관은 다 다르죠. 내세관이 반영된 무덤의 다양한 형태를 보는 일도 매우 흥미로워요.



 저는 잘 관리된 무덤을 보면 남은 후손들이 이렇게 돌아가신 분을 기리며 사랑의 위로를 받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의 존재를 있게 한 분에 대한 그리움, 마음에 드는 허기가 자신을 삼키기 전에 달려와 토로하며 가만히 안겨있는 마음의 안식처를 만들어 둔 건 아닐까란 생각 말이죠. 세상에서 자신을 증명하고자 분투하다 노력만큼 되지 않은 일들에 상처를 받고 숨어들 수 있는 자신만의 오두막. 그런 곳이 바로 무덤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해요.

그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그러다가 그게 나타나면 단 한순간에 확실해지지요.

  -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상실을 인정하고 마주할 수 있는 공간에서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때 우리는 한 뼘 더 내면의 성숙을 하게 되는지도요. 그래서 어린 날 무서움도 없이 기르던 강아지와 함께 무덤가에 가서 놀았어요. 가끔 눈 오는 날에 비료포대에 헌 옷 가지나 지푸라기 잔뜩 넣고 미끄럼틀로 이용한 건 정말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틈틈이 잡 풀 뽑아드리고 산짐승이 낸 구멍들 메꿔주며 움막지기 노릇했으니 용서해 주시겠죠?








 이번 책은 함정임의 <유럽 묘지 기행>입니다. 제주 시인의 집을 통해 구매한 책이죠. 초판본이라 저자 사인까지 받았습니다. 적어주신 글귀가 참 좋아서 받아 들고 선물을 받은 것처럼 정말 행복했어요. 여행지에 가게 되면 묘지들을 지날 때가 있어요. 잘 관리된 묘비를 바라보며 어린 날의 평온, 삶에 대한 궁금증 등을 다시 떠올려 보게 되거든요. 어른이 되어 만나는 죽음이란 존재의 무게는 어릴 때의 막연함과 전혀 다른 결로 다가오지만요.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으니 그렇게 느끼는가 봅니다. 허무보다는 예정된 끝이 있기에 더 열정적으로 오늘을 보내자 다짐하게 되어요. 저자는 총 7개의 묘지를 찾는 여정을 유려한 글로 펼쳐내고 있어요.







1. 장미와 함께 잠들다 - 몽파르나스 묘지

2. 펜으로 바꾼 세상, 세기의 전설 - 팡테옹

3. 붉은 장미 가슴에 묻고 - 몽마르트르 묘지

4. 돌에 새긴 이름, 영원의 노래 - 페르 라셰즈 묘지

5. 정오의 태양 아래 깃드는 고독 -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세트까지

6. 사랑으로 죽고, 죽음으로 살고 - 아일랜드 슬라이고에서 그리스 크레타까지

7. 불멸의 휴식, 영원의 에필로그 - 베를린에서 빈까지



 작가가 찾아간 묘지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잠들어 있죠. 그중 인상적인 두 편을 옮겨봅니다.











세트에 가면, 검푸른 바다 위로 정오의 태양이 내리쬐고 그 그림자 죽음처럼 고요히 살굿빛 기와지붕을 타 넘을 때, 나는 작은 검은 고양이가 되어 소리도 없이 그 옆을 지나가리라 꿈꾸었다. 그곳에 가면,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에 내 청춘의 서툰 욕망에 갇혀 새카맣게 타버린 시어들을 무심히 방생하리라, 마음먹었다.
                                            p.344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말라르메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발레리를 재발 결한 기쁨을 표현했죠.

 나는 홀로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내 모든 작품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발레리를 읽었다. 그리고 내 기다림이 끝난 걸 알았다.





 <젊은 운명의 여신>을 내놓기까지 20년 간을 침묵한 시인 폴 발레리. 발레리는 침묵만이 가장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생각했답니다. 5년 간의 명상과 철저한 반성 끝에 탄생한 순수시의 절정. 난해하나 순결하고 지극히 아름다운 언어들로 이루어진 글이 나오기까지 그가 걷고 생각에 잠기고 무언가 써 내려갔을 세트의 해변묘지를 작가의 시선을 따라 거닙니다. 가족묘지에 합장된 폴 발레리, 그가 잠든 눈부신 남프랑스의 해변 풍경과 빛의 산란으로 온통 투명하게 일렁이는 정오의 그림자들이 고요한 침묵으로 반겨주는 묘지. 군락을 이룬 영혼의 나무 사이프러스가 그를 지키는 곳을 만나게 됩니다.




 나는 순수한 너를 너의 제일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스스로를 응시하라.

오, 사색 뒤에 오는 보상. 신들의 고요에 던져진 그토록 오랜 시선.

          -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중에서




 바람이 불자, 살아야겠다 다짐하며 눈앞의 바다를 응시했을 시인을 그리며 글을 마음에 품는 시간입니다.



 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장소는 그리스 크레타섬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이었습니다. 작가는 크노소스팰리스호를 타고 에게 해의 달빛을 입으며 섬을 찾아갑니다.

 

 닥치는 대로, 무엇을 이용하든 일을 하며 럼주를 즐기고, 산투르를 연주하며 어디서든 즐겁게 춤을 추고 노래하는 광인 혹은 초인처럼 보이는 조르바.


 항상 무언가를 찬미하라. 찬미야말로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


 라고 말을 하며 삶을 온몸으로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그를 본 소설 속 나는 자신이 처음 만나는 인물형인 조르바에게 순식간에 매료되어 자신의 모든 걸 걸어버리죠.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1964)에서 부조키 가락에 맞춰 두 팔을 알바트로스 새처럼 활짝 펼치고 춤을 추던 안소니 홉킨스의 몸짓과 표정이 떠오릅니다.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며 인생을 즐긴다는 것. 그 전의 세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소설 속 인물형이었죠. 소설은 영화로 인해 스테디셀러가 됩니다. 한 편의 작품이 전해주는 영감이 다양한 장르를 통해 재해석되고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이 늘 놀라워요.



 니코스 카잔치키스의 무덤은 그의 작품 <최후의 유혹>으로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한 탓에 엉성한 나무 십자가로 되어 있죠. 돌판은 깨어져 잡풀이 자라고 있고, 아주 작은 묘비명이 특징 없는 돌판에 자리해 있죠. 하지만 에게 해를 바라보며 바람을 가늠하듯 팔을 펼치고 있는 길쭉한 십자가가 되려 춤을 추는 조르바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리스어로 새겨진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글귀죠.












 작가의 나침반은 정교하고 섬세해요. 어떻게 이런 길로 우리를 이끌까 싶게 다양한 장소에 잠든 인물들의 삶에 대해 깊이 톺아보게 만들죠. 그리고 계속 걷게 만들어요. 열병을 앓듯 우리와 다른 결의 공기를 폐에 품고 싶어 안달이 나게 만들죠. 깊이 잠든 이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남긴 문학적 발자취를 더듬는 시간은 불멸이 완성되어 가는, 인간 삶의 놀라운 정신적 유산의 귀중함 또한 느끼게 만듭니다. 일회적이고 소모적인 소란한 뉴스들과 가십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게 되는 우리들의 일상에 쉼표를 제공합니다.



 고요한 침묵의 깊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 이들에 대한 존경과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헌사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도 우리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고 걸어가야 할 지에 대해 고민해 보게 만듭니다. 다시 또 손에 들게 될 책입니다. 오래 가까이 두고 읽으며 서정적인 문장 속을 마음껏 거닐고 싶은 책을 만나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묘비명은 어떤 걸 쓰고 싶은가요? 저는 오늘부터 고민해 보려고요. 수목장을 하더라도, 바다 위 먼지처럼 흩어지더라도. 저를 배웅해 주는 이들에게 전할 한 줄의 글귀. 그걸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살아보렵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폴 발레리의 말처럼요.

가을이 느껴집니다. 이 계절, 평안한 숨비소리를 되찾는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 같이 듣고 싶은 곡


쇼스타코비치 왈츠 넘버 2 

- 레이어스 클래식 연주



https://youtu.be/xA5op7h99iY?si=LdkWZmZeEnlfct9O











#함정임

#모든것이거기있었다

#제주시인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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