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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by 봄단풍


“세상에 점점이 뿌려진 아름다움은 우선 순위를 정하지 않을수록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름다움에 순서를 정하지 않으면, 그만큼 감사할 것이 많아지더라고요.”




저는 여행을 참 좋아합니다. 평소에 잘 가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평소에 잘 쓰지 못하는 돈을 많이 써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이래저래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을 두고 잠시 떠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인지도요. 그래도 굳이 이유를 정리해보자면, 낯선 곳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서 좋기도 하고, 낯선 곳에서 익숙한 향기를 맡았을 때의 반가움이 좋기도 해서랍니다.


그냥 처음 보는 걸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만족스럽습니다. 사이사이 골목길을 두고 저들끼리 높게 솟아오른 번쩍거리는 빌딩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어깨동무하고 나란하게 선 누런 건물들을 보는 것도 재밌고, 매캐한 매연 너머로 새벽내 타고 남은 고기냄새나 담배냄새가 아니라, 전날 밤 내린 비에 젖은 풀냄새나 처음 보는 향신료의 냄새를 맡는 것도 좋고. 삼분의 이 지점에서 있는 대로 고음을 내지르며 오케스트라가 빵빵 터지는, 익숙한 기승전결의 노래가 아니라 낡은 나무통을 두드리는 소리, 거기에 매달린 실을 튕기면서 나는 낯선 노래를 듣는 것도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낯선 공간에서 아주 반가운 장면을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술을 몇 잔 괜히 기울이고 싶어지기도 하더라고요.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의 방송을 듣다보면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휴대용 라디오가 떠오르고, 늘어진 금빛 햇살 아래에는 성적표를 구긴 채 집에 들어가기 무서워하던 중학교 소년도 떠오르고. 그러다가 해질녘이 되면, 야근하던 아버지가 한 손에 과자를 든 채로 풍기시던 술냄새와 독한 스킨냄새가 떠오르기도 하고.


그 낯선 공간이 주는 짜릿한 행복, 그 속에서 발견한 익숙함이 주는 반가운 행복이 바로 그 잘 가지도 못하는 여행을 매일 밤 꿈꾸게 하는 녀석들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간혹 따지는 분도 있습니다. 낯선 게 좋으면서 익숙한 것도 좋다는 게 뭐냐, 하나만 정해야지, 사람이 모순된다고.


취향 얘기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가사 한 줄 한 줄 생각하게 하는 음악이 좋고 때로는 아무 생각없이 흥얼거릴 노래도 좋다하면, 그래도 둘 중에 더 좋은 게 하나는 있지 않냐고 따지는 분들. 그 때 그 때 다른 걸 어떡해.


세상이 냉혹하다 하는 이유는 때로 선택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점점이 뿌려진 아름다움은 우선 순위를 정하지 않을수록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무섭다는 세상도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아름다운 구석이 있는데, 어찌 세상 모든 것이 이거 아님 저거라고 확정할 수 있겠어요. 아름다움에 순서를 정하지 않으면, 그만큼 감사할 것이 많아지더라고요.


때로는 또렷하게 경치가 나오는 사진도 좋고, 가끔은 멍한 눈으로 훑듯이 군데군데 번진, 초점 어긋난 사진도 좋고. 사는게 그렇습니다. 누구나 이거 아니면 저거! 둘 중에 하나로 확정하는 것이 깔끔하니 좋다고 하지만 정작 흐리멍텅하니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을 때가 많더라고요. 언젠가는 그런 자세가, 우유부단하다고 지탄 받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동경할만한 자세로 존중받는 날이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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