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나의 힘 1
앞서 언급한 것처럼 춘추 시대는 주나라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대였다. 주무왕은 천명天命을 받들어 은나라를 친다며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하늘은 더 이상 주나라 편이 아닌 것 같았다. 제환공은 이 틈을 비집고 세력을 떨친 인물이었다.
제환공은 크게 위세를 떨쳐 여러 제후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을 정도였다. 일종의 정상회담을 주도했던 인물인 셈. 힘으로 여러 제후들을 압도한 그를 '패霸'라 불렀다. 그는 첫 번째 패자로서 제나라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그가 이렇게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관중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관중과 포숙아 그리고 훗날 제환공이 되는 공자 소백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시간에 알아보았다.
그러나 관중이 세상을 떠나자 환공의 위세도 꺾여버린다. 게다가 환공의 다섯 아들이 임금 자리를 두고 다투기까지 한다. <사기세가>는 그의 비참한 죽음을 이렇게 전한다.
환공이 병이 났을 때, 다섯 공자는 저마다 파당을 만들고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환공이 죽자 마침내 서로 공격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궁중이 비어 감히 입관시킬 수조차 없었다. 환공의 시신이 침상에 67일이나 있어 시체의 벌레가 문밖까지 기어 나왔다.
<제태공세가> (이하 번역문은 김원중 역 참고)
제환공을 이어 패권을 쥔 것은 진문공晉文公 중이였다. 그는 일찍이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방랑생활을 한 이력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진세가>를 참고하도록 하자.
보통 춘추시대에는 총 다섯 명의 패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 다섯 명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이야기하는 바가 다르다. 다섯이라는 숫자에 끼워 맞추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연이어 패자가 등장했다는 점은 과거 주왕실을 중심으로 한 봉건체제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나라는 상징적인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세 번째 패자, 초장왕楚莊王의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초장왕은 군주의 자리에 올라 삼 년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밤낮으로 향락을 일삼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공포하였다.
"감히 간언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고 죽이겠다.(有敢諫者死無赦)"
이때 왕의 명령을 어기고 초장왕을 찾아갔던 이가 오거伍舉, 오늘의 주인공 오자서의 할아버지였다. 이 둘은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오거가 입궐하여 간언했다. 장왕은 왼팔로는 정나라의 희첩을 껴안고, 오른팔로는 월나라 여자를 껴안은 채 악대 사이에 앉아 있었다. 오거가 말했다.
"원컨대 수수께끼를 하나 올리겠습니다."
그러고는 이어서 말했다.
"새가 언덕에 앉아 있는데,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니 이것은 무슨 새입니까?"
장왕이 말했다.
"3년 동안 날지 않았으나, 날면 하늘로 치솟아 오를 것이고, 3년 동안 울지도 않았으나,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 오거, 그대는 물러갈지니 나는 이 말뜻을 알겠다.
<초세가>
삼 년간 울지도 않고 날지도 않는 새, 그 새가 울지도 날지도 않았던 이유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까닭일 테다. 거꾸로 삼 년이나 울지도 날지도 않았다면 그 새가 날아오를 때엔 그 새의 비상이 만만치 않음을 예상할 수 있다.
초장왕은 자리에서 떨쳐 일어났을 때 수백 명의 목을 베었고 수백 명을 새로 발탁하여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고 한다. 궁안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며 남몰래 살생부를 작성하고 있었던 것일 테다. 수수께끼 같은 말로 왕의 뜻을 물었던 오거가 높은 자리에 임명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참고로 이삼 년을 울지 않는 새의 고사는 위에 인용한 <초세가>의 것 이외에 다른 부분에도 기록되어있다. <골계열전>에 실려 있는데 이번에는 주인공이 다르다. 순우곤과 제위왕이다. 아마도 비슷한 이야기가 당대에 여럿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이 이런 이야기를 수집하여 기록한 것은 어째서일까?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뜻, 숨어서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구세력을 일소에 제거한 초장왕은 나라를 정비한 뒤에 정벌에 나서 송나라를 치고 이어 주나라에까지 이른다. <초세가>에는 초장왕과 주정왕周定王과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다. 초나라 강성하여 주나라 수도에까지 이르렀으나 이들이 주고받은 대화를 보면 초나라도 주나라를 무시할 수 없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장왕] 8년, [장왕은] 육혼에 사는 융족을 정벌하여 드디어 낙읍에 이르렀다. 주나라 교외에서 열병 의식을 거행했다. 주나라 정왕은 왕손만을 보내 초나라 왕(장왕)을 위로했다.
초나라 왕이 구정九鼎의 크고 작음과 가볍고 무거운 것을 물으니, [왕손만이] 대답하여 말했다.
"덕행에 있는 것이지, 보정寶鼎에 있지 않습니다."
장왕이 말했다.
"그대는 구정의 귀중함을 막을 수 없소. 초나라가 검극의 예봉을 꺾는다면 충분히 구정을 주조할 수 있소."
왕손만이 말했다.
"…(중략) 주나…라의 덕정이 비록 쇠약했지만, 하늘의 명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구정의 가볍고 무거움은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초세가>
본디 초나라는 양쯔강 주변에서 발흥한 나라로, 중원의 문화와는 거리가 있었다. 사마천도 이들이 스스로 만이蠻夷, 오랑캐라고 일컬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초장왕의 먼 조상, 웅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랑캐 사람이니 중국의 시호를 쓰지 않겠다. (我蠻夷也 不與中國之號謚)" 이런 까닭에 초나라는 일찍이 왕王이라는 칭호를 썼다. 초장왕 이전의 패자, 제환공과 진문공晉文公은 모두 주周의 제후로 ‘공公’을 사용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다르게 말하면 초나라의 부상은 본디 오랑캐의 나라로 여겨졌던 지역이 중원으로 편입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문화, 문명의 영역이 이제 주周를 중심으로 한 천하天下의 한 모퉁이로 새롭게 해석된다. 그렇기에 사마천의 <사기>야말로 ‘중국적 세계’의 밑그림을 그린 최초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덧붙여 이야기하면 여기서 말하는 '중국'이란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팽창하며 구성한 공간을 말한다. 하나의 단일체가 아니라 다양한 것이 유입되어 성장-팽장 하는. 사마천의 시대에 이르면 이미 초나라 지역은 중원의 세계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것은 한漢나라의 개국 공신들 가운데 대부분이 초나라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춘추오패란 주왕실을 중심으로 한 권력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며, 이를 대신하는 새로운 권력이 일시적으로 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문명세계 바깥에 있던 세력들까지 새롭게 중원에 편입하여 중원의 세계를 두고 다투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펑유란은 <중국철학사>에서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을 서술하며 중국 역사에 유래 없는 자유로운 사상의 시대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다양한 힘들이 교차하고 뒤섞이는 시대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