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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08. 2021

상앙, 꿈을 찾아 진나라로 떠나다

부국강병일통천하1


진秦은 서쪽 변경에 속한 나라로, 초나라처럼 초기에는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문명 세계 안에 속하지 못했다. <진본기>에 따르면 주나라 유왕이 서쪽 오랑캐의 침입을 받아 죽었을 때 진양공秦襄公이 주周를 구해주었다고 한다. 이때 유왕을 이어 왕이 된 평왕平王은 양공을 기산 서쪽의 제후로 삼았다. 이처럼 진나라는 한참 뒤에나 주나라의 제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진나라가 본격적으로 천하에 위세를 떨치게 된 것은 효공에 이르러서였다. <진본기>에 따르면 효공 시대를 이렇게 서술한다. ‘황하와 효산 동쪽으로 강대국 여섯이 있었다. 효공은 이들 제나라 위왕, 초나라 선왕, 위나라 혜왕, 연나라 도후, 한나라 애후, 조나라 성후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진나라와 동쪽의 육국, 흔히 이야기하는 전국칠웅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강국의 이름 가운데 주왕실에 대한 설명이 빠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제 주왕실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 주나라가 근근이 유지하고 있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효공 시대에 진은 나라 전체를 개혁하여 크게 강성하게 된다. 여기에는 공손앙公孫鞅, 혹은 위앙衛鞅 훗날 상앙商鞅이라 불리는 이의 역할이 크다. <사기열전>에서는 그를 상군商君으로 소개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훗날 상商 땅을 봉지封地로 받기 때문이다. 


상군商君은 위衛나라 왕의 여러 첩이 낳은 공자로서 이름은 앙鞅이고 성은 공손 씨公孫氏이며 그 조상은 성이 희姬였다. 공손앙은 젊어서부터 형명刑名의 학문을 좋아하고 위魏나라 재상인 공숙좌를 섬겨 중서자가 되었다.  

<상군열전>,  김원중 역


여기서 말하는 '형명의 학'이란 바로 형벌로 백성을 다스리는 학문, 즉 법가法家를 말한다. 그는 위나라의 공숙좌를 섬겼다. 어느 날 공숙좌의 병이 깊었는데 그에게 문병을 찾아온 임금에게 공손앙, 즉 훗날 상앙이 되는 그를 재상으로 삼으라고 권한다. 한편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공숙좌는 그를 재상으로 삼지 않으면 그가 다른 나라로 넘어갈 것이므로 그를 일찌감치 죽야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즉, 등용하거나 죽이거나. 


그렇게 말했지만 공숙좌는 상앙에게 미안했다. 보아하니 임금에게는 공숙좌를 등용할 낌새가 보이지 않고, 상앙을 죽이라 했으니 상앙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결국 상앙을 불러 말한다. 


"오늘 왕께서 재상이 될 만한 인물을 묻기에 나는 당신을 추천하였으나 왕의 낯빛을 보니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았소. 나는 군주가 먼저이고 신하가 나중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왕께서 당신을 기용하지 않으시려면 죽여야 한다고 하였소. 왕은 나에게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였소. 그대는 빨리 떠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곧 붙잡힐 것이오.

공손앙이 말했다. 

"저 왕께서는 당신 말을 듣고도 저를 임용하지 않는데, 또 어찌 당신 말을 들어 저를 죽이겠습니까?"

끝내 떠나지 않았다. 

<상군열전>


들어 쓰라는 말을 듣지 않았는데 어찌 죽이라는 말을 또 듣겠는가? 실제로 임금은 자리를 뜨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공숙좌가 심히 병들었다. 어찌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지. 그러나 그의 이 선택이 재앙의 씨앗이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때 위나라의 임금이 바로 혜왕惠王이다. 그는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임금 가운데 꽤 널리 알려진 인무이다. 어찌 그렇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을까? 사실 그는 위혜왕魏惠王보다는 양혜왕梁惠王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맞다. <맹자>를 펼치면 등장하는 양혜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위혜왕이 양혜왕이 된 것은 한참 뒤의 이야기이다. 미리  앞당겨 이야기하면 훗날 상앙은 진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한다. 이에 위나라는 크게 패배하고 수도를 동쪽 대량大梁, 오늘날의 카이펑開封으로 옮겨야 했다. 결국 양혜왕이라는 이름은 이웃 나라의 공세로 수도를 옮겨야 했던 치욕스런 상황을 반영한 이름이다.


이것은 다 상앙을 놓치고 이웃나라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위혜왕이 놓친 인물은 또 있다. 바로 손빈孫矉이다. 전쟁의 귀재, 손무孫武의 후손이었던 그 역시 병법에 빼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 방연에게 모함을 받아 불구의 몸이 되어 버린다. '빈矉'이라는 이름은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기에 붙은 이름이다. 그는 불구가 된 몸을 이끌고 동쪽 제나라로 떠난다. 그 역시 제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에 쳐들어 온다. 자신을 불구로 만든 위나라의 장군 방연을 죽여 통쾌한 복수를 이루면서 제나라에 큰 승리를 가져다준다. 이 내용은 <손자오기열전>에 실려 있다. 


결국 위혜왕은 뒤늦게 이웃 나라에서 여러 인재를 불러 모아 나라를 새로 정비하고자 한다. 맹자가 위혜왕, 그러니까 양혜왕을 만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이 당시 상황을 좀 보자.


여러 차례 전쟁에서 패하자 혜왕은 예를 갖추고 예물을 마련하여 빼어난 인물을 불러 모았다. 추연, 순우곤, 맹가가 수도 대량에 이르렀다. 

양혜왕이 말하였다. "과인이 못난 탓에, 세 번이나 전쟁에서 패하였습니다. 태자가 포로 잡혀갔고 상장군이 목숨을 잃어 나라가 텅 비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조상과 종묘사직에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어르신께서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누추한 이 나라의 조정에까지 이르셨으니, 이제 내 나라에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시려나요?" 

맹자(맹자)가 말했다. "임금께서 이처럼 이익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군주가 이익을 바라면 그 아래의 대부도 이익을 바라고. 대부가 이익을 바라면 그 아래의 백성들도 이익을 바랍니다. 위아래가 이익을 두고 다투면 나라가 어지러워집니다. 군주가 되어 인의仁義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어찌 이익을 바라겠습니까!"

<위세가>


이 이야기는 당시 인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위나라에서 아무 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상앙은 이웃 나라로 눈을 돌린다. 서쪽의 진나라는 변경에 있었던 탓에 나라 밖의 인재들을 널리 불러 모았다. 상앙 역시 기회의 땅 서쪽 진나라로 떠난다. 


상앙은 패왕의 이야기로 효공의 환심을 샀다. 어찌나 상앙의 이야기가 효공의 관심을 끌었는지 무릎이 앞으로 나가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고 한다. 상앙의 말이 효공의 마음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한비자는 <세난說難>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체로 유세의 어려움은 내 지식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고, 내 말솜씨로 뜻을 분명히 밝히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며, 또 내가 감히 해야 할 말을 자유롭게 모두 하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다. 유세의 어려움은 군주라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파악하여 내 주장을 그 마음에 꼭 들어맞게 하는 데 있다.

<노자한비열전>


임금을 만나 자신의 뜻을 솔직 담백하게 늘어놓지 말 것. 임금의 의중을 파악하고 임금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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