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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08. 2021

변법, 개혁의 칼날을 들이대다

부국강병일통천하2

상앙이 처음부터 효공의 마음을 산 것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효공은 졸며 상앙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어째서일까? 상앙은 '제도帝道', 그러니까 고대 성인들의 도에 대해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두 번째 만남도 신통치 않았다. 이번에는 '왕도王道', 은나라의 탕왕이나 주나라의 문왕과 같은 덕목을 갖춘 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란다. 세 번째 만남에서야 효공의 마음을 산다. '패도霸道', 패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효공을 만날 기회를 얻은 상앙은 드디어 효공에게 등용된다.


이에 대해 상앙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공에게 삼황오제의 도를 실행하면 삼대에 견줄 만한 태평성대를 누릴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주군께서는 '나는 너무나 길고 멀어서 나는 기다릴 수 없소. 그리고 어진 군주는 자기가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세상에 이름을 나타내는데 어찌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뒤에 제왕의 사업을 이루기를 기다릴 수 있겠소?'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강한 나라를 만드는 방법을 주군께 말씀드렸더니 주군께서 기뻐하신 것뿐입니다. 하지만 은, 주 시대 임금의 덕행에 견주기는 어렵습니다.

<상군열전>


고대 사회의 이상을 실현하기는 요원하며, 새롭게 강한 나라를 꿈꾸는 것이 현실적이다. 바로 부국강병의 꿈이다. 이 꿈을 실현시키고자 상앙은 변법變法, 즉 법을 통한 개혁을 실행한다. 


이 과정 가운데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옛것을 없애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상앙의 시도에 반발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이들의 토론 가운데 핵심적인 부분을 옮겨보자. 과연 누구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지 생각해보자.


상앙 : "성인은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으면 구태여 옛것을 본뜨지 않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으면 옛날의 예악 제도를 좇지 않았습니다."

감룡 : "성인은 백성의 풍속을 바꾸지 않고 교화시키며, 지혜로운 자는 법을 바꾸지 않고 다스립니다. 백성의 풍속에 따라 교화시키면 힘들이지 않고도 공을 이룰 수 있고, [있는] 법에 따라 다스리면 관리도 익숙하고 백성도 편안할 것입니다."

상앙 : "삼대는 예악을 달리하고도 [천하에서] 왕 노릇을 하였고 오패는 법제를 달리하고도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통제를 받으며, 현명한 자는 법을 고치고, 평범한 자는 얽매입니다.

두지 : "이로움이 백 배가 되지 못하면 법을 바꿀 수 없고, 효과가 열 배가 되지 못하면 기물을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옛것을 본받으면 허물이 없고 예법을 따르면 사악함이 없게 됩니다."

상앙 :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나라에 편하면 옛날 법을 본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탕왕과 무왕은 옛 법을 따르지 않았지만 왕 노릇을 하였고,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 주왕은 예법을 바꾸지 않았지만 멸망했습니다. 옛날 법을 반대한다고 해서 비난할 것도 아니고 예법을 따른다고 하여 칭찬할 것도 못 됩니다."


짐작한 대로 결과는 상앙의 승리. 상앙은 매우 설득력 있게 반대파의 논리를 깨뜨리고 있다. 실상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상앙의 주장이 옳다. 과거 시대의 방법을 끝까지 고수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는 데 따라 통치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그 변화는 얼마나 힘든 것인가.


상앙은 매우 단호하게 개혁을 추진해 나간다. 그는 크게 두 차례의 개혁을 벌인다. 첫 번째 개혁에서 그는 열 집 혹은 다섯 집으로 백성을 묶고 서로 감시하게 한다. 그리고 죄를 지었을 경우 이들을 함께 벌주도록 했다. 한편 형벌을 매우 가혹하게 집행하도록 하였으며, 성인 남성이 한 집에 함께 살지 못하도록 하였다. 


상앙은 하부로부터 생산 조직을 체계적으로 갖추려고 했다. 몇 가구를 묶어 그 단위에서 부역을 부과하도록 하여 성과를 높였다. 가구를 나눈 것은 농지 확대와 세수 확대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통상적으로 당시에는 가구당 세금이 부과되었는데 이를 장정에 따라 나눈 것이다. 게다가 당시만 하더라도 미개척지가 많았으므로 이들 분리된 세대는 또 다른 경작지를 개간하여 국가 생산량을 늘일 수 있었다. 


부국강병! 나라의 생산을 늘렸으면 군대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군대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 가운데 여럿이 있겠지만 그는 군공에 따라 벼슬을 주는 방법을 택했다. 나아가 귀족이라 하더라도 전쟁에서 공을 세워야 했다. 그리고 공과에 따라 철저하게 차등을 두었다. 상앙은 매우 일찍부터 이른바 성과급 시스템으로 국가를 운영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는 국가 전체를 마치 커다란 군대처럼 운용했다. 국가의 생산을 늘려 전쟁에 대비했으며, 백성들은 언제든 전쟁에 나라 공을 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앙이 세운 시스템의 효과는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엄벌을 통해 반대 여론을 제거했으며, 예외 없이 법령이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백성의 기대를 모았다. 


법령이 이미 갖추어졌으나 널리 알리기 전이라 백성이 믿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도성 저잣거리의 남쪽 문에 세우고 백성을 불러 모아 말했다.

"이 나무를 북쪽 문으로 옮겨 놓는 자에게는 10금을 주겠다."

백성은 그것을 이상히 여겨 아무도 옮기지 않았다. 다시 말했다.

"[그것을] 옮기는 자에게는 50금을 주겠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옮겨 놓자 즉시 50금을 주어 속이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마침내 새 법령을 널리 알렸다.


상앙은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든 동시에 그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상호 신뢰도 염두에 두었다. 설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법령으로 정해진 것은 반드시 지킨다는 사실을 백성에게 일깨워줬다. 설사 귀족이라 하더라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한 번은 태자가 법을 어기는 일이 있었다. 상앙이 아무리 예외 없는 법집행을 강조했다 하지만 다음의 임금이 될 태자를 벌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그는 태자의 태부, 즉 후견인 역할을 하는 공자건과 공손가를 대신 처벌했다. 그의 서슬 퍼런 태도 때문에 공자건이 다시 죄를 저질렀을 때 코를 베이는 형벌을 받기까지 했다. 


상앙의 개혁에 백성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전반적으로 꽤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건 법령에 따라 군공을 세우기만 하면 귀족의 자리에 오를 길이 열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존 귀족들에게도 예외 없이 집행된다는 점이 얼마나 큰 매력이었겠는가. 그렇기에 진나라 군대는 다른 나라의 군대보다 훨씬 용맹스러웠다고 한다.


두 번째 개혁은 수도를 함양으로 옮기는 것, 수도를 동쪽으로 옮겨 동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로 삼았다. 한편 읍邑과 현縣으로 나라를 나누었다. 이와 더불어 부세를 공평하게 하였고 도량형을 통일했다고 한다. 과연 얼마나 실효성 있는 개혁이었는지는 궁금하다. 중앙 집권의 관료제와 이를 기반으로 한 합리적인 세금 체계는 그렇게 간단히 만들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훗날 진시황의 통일 이후에 군현제와 도량형, 문자의 통일 등이 다시 언급되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기초적인 수준에서 나라의 체제가 재편되었다 짐작할 수 있다. 상앙의 개혁으로 진나라는 차곡차곡 힘을 쌓을 수 있었다. 


이전 01화 상앙, 꿈을 찾아 진나라로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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