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소설 속 엄마 캐릭터를 설정한다면?
소싯적 나는 드라마와 소설에 푹 빠져있었다. 나의 최애 장르는 로맨스. 부끄럽지만 여주인공에 빙의하여 매번 스토리에 감정이입했다. 짝사랑 단계에서는 홀로 가슴앓이도 하고, 예상치 못한 이별에는 이불을 적시고, 해피엔딩에는 날아다녔다. 어느 CF 카피 그대로 글로서 수십 번의 찐한 연애를 경험한 것이다.
와! 어떻게 작가는 그런 생각을 해냈을까? 그의 상상력을 동경하던 어린 나는, 무모하게도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열혈 독자에서 초보 창작자로서, 내 맘대로 설정할 수 있는 포지션에 앉았다. 흠, 주인공은 로맨스를 좋아하는 여학생. 생각을 확장한 그 끝은 '나'란 캐릭터였다. 참 무난하군. 뭔가 인물 관계 사이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몰입력 있는 스토리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캐릭터의 서사를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진짜 본캐를 숨기고 살아가는 천방지축 러블리 여전사다.
언젠가는 캐릭터들이 종횡무진 활약하는 소설을 완성해 내리라 다부진 포부를 밝혔지만, 눈을 감았다 떠보니 지금의 나는 더 독보적인 장르 속에 존재했다. '인생'. 해가 거듭하면서 소녀의 시대는 지고 청춘의 시대를 거쳐 엄마의 시대로 넘어왔다. 이제 부제는 '육아'. 나는 엄마라는 캐릭터를 열연 중이다. 그리고 모든 말과 행동이 라이브로 중계되고 있다. 관찰자이자 상호 캐릭터인 아이들에 의해서 말이다. 이 장르의 특징은 돌이킬 수 없이 일어난 그대로 기록이 쌓여간다는 것이다.
나는 그럼 어떤 엄마캐릭터지? 얼떨결에 엄마가 되었고 8년 차 캐릭터로 살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제대로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우리는 나름의 합당한 근거를 찾아 매 순간을 선택하면서 살아간다. 그 배경에서 인터넷의 정보에 휩쓸려, 주위의 기 센 목소리에 팔랑이기도 했다. 돌아보니 후회가 되는 발걸음들을 남기기도 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렇게 오래 속앓이 할 필요가 없었는데. 참 애매하거나 고집스러운 태도를 가져서 아이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다. 이제는 스스로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내 즉흥적인 면을 좀 다듬어나가 일관성 있는 육아의 태도를 갖고 싶다.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은 다양한 가이드라인을 활용할 수 있다. 가이드에 맞춰 하나씩 하나씩 설정하고 나면 생동감이 느껴지는 캐릭터가 되는 법. 그중 캐릭터의 내면을 설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어떤 경험을 해왔고, 어떤 욕망이 있는지에 따라 캐릭터의 행동이 설득력이 있고, 스토리를 주체적으로 끌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육아의 강력한 목표인, 즐거운 육아를 위해 엄마로서 내 안의 동기를 점검해 보는 것부터 어떤 환경을 세팅해야 할지, 전반적으로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한 번씩 훑어보는 객관적인 성찰을 하고 싶어졌다. 그런 배경에서 내 중요한 육아 톤 앤 매너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더 나아가 적절한 루틴이자 리추얼이 생기겠지.
나는 어떤 엄마가 되고 싶은 걸까? 유쾌한 분위기에서 그저 모든 것을 허용하는 엄마는 되고 싶지 않다. 엄격함에 용기를 낼 줄 알고, 아이를 능숙하게 이끄는 기술이 있으면 좋겠다. 기본적인 성실한 루틴으로 아이에게도 건강한 습관을 잡도록 돕고 싶고 기본기를 통해 성장에 주체적으로 집요함을 가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문득 엄마로서의 MBTI가 있다면, 나는 어떤 유형이 찰떡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나 자신으로서는 명확한 MBTI를 갖고 있다. 신기하게도 이건 일과 친구 사이에서만 먹히는 것 같다. 나는 꽤 오랫동안 일관성 있게 하나의 MBTI를 유지해 왔다. ENFP(재기 발랄한 활동가). 의미와 영감을 추구하며 솔직하게 개방적인 성격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에너지를 얻는 스타일. 그런데 엄마로서 자주 의외의 모습이 튀어나온다.
혼자서의 시간이 좋아졌다. 매일 아이들이 잠든 후엔 충분한 숙고의 시간을 갖는다. 수면시간을 줄이더라도 충전하고 하루를 반추하는 시간이 참 소중하다. 나아가서 아이의 엄마로서 모이는 자리에서는 본래 캐릭터를 쉬이 드러내지 않는다. 관계를 쌓아가는 대화가 어렵게 느껴지고 대부분은 의미를 크게 느끼지 못해서다. 그래서 종종 소극적인 캐릭터로 변신하곤 한다. 또 아이의 스케줄과 학습 진도를 꼼꼼히 확인하기 위해선 J의 전유물인 캘린더나 플래너를 적극 활용한다. 스스로에겐 숨 막혀서 하지 못하는 걸 아이에게는 당근을 주면서 적용해 본다.
육아의 마라톤은 이미 시작되었다. 한참 달리는 중에 갑자기 나의 엄마 캐릭터를 정의하는 여정을 10주간 시작해 본다니 늦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모든 것을 다 해박하게 시작할 수 없는 레이스라는 것도 알지만, 학령기 이전과 이후로 갈라진 초1 아이를 둔 학부모로서 더 이상 휘둘리지 않고 싶어서, 엄마로서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상황들에서 어떤 기준을 지켜낼 것인지, 아이의 성장에서 매번 새로운 과제가 주어질 때 엄마로서도 어떤 레벨업을 해야 하는지.. 의미 없이 팔랑이는 생각의 끈들을 단단히 매듭으로 묶어내려고 한다. (그 가장 확실한 방법이 글이니까.)
어쨌거나 엄마 캐릭터 만들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