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고 모아두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방 한구석엔 어렸을 때부터 모아 온 기록 상자가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모아 온 상장, 일기, 공책, 롤링 페이퍼, 그림, 성적표 등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옆에 있는 종이 박스엔 여자 친구와 만나며 주고받은 편지, 사진, 공연 티켓 같은 추억이 들어 있다. 1년간 데이트한 사진을 모아 연간 포토북을 만들기도 하고, 영상을 많이 찍게 된 요즘엔 월별로 영상을 편집해 유튜브에 비공개로 올려놓기도 한다.
어릴 적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실제 살아온 날짜가 아닌 기억할 수 있는 날의 숫자가 진짜 나이가 아닐까? 70년을 살아도 지난날을 많이 잊었다면 공허할 테고, 30년을 살아도 많은 날을 기억하면 충만할 테니까. 내 하루하루가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게 싫었기 때문에 기록을 남겼고 차곡차곡 상자에 모아갔다. 스마트폰이 발전하며 모든 게 디지털화되던 시기엔 저장 방식도 조금 바뀌었다. 사진이 너무 많아 일일이 인화해 보관할 수 없었고 영상은 디지털로 저장할 수밖에 없었다. 외장하드를 하나 구매해 사진과 영상을 보관했다. 폴더를 차곡차곡 만들어 연도별, 월별, 사건별로 분류해 두었다. 언제든 손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가구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 꿈꾸는 것 중의 하나는 이런 기록들을 보관할 서랍장을 하나 만드는 것이다. 다층으로 만들어 각 층의 서랍마다 다른 주제로 기록을 분류 보관할 생각이다. 나라는 사람을 나타내는 단 하나의 서랍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작업이기에 괜히 신중해져서인지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주거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라 미리 만들어 놓으면 나중 이사할 때 짐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해서 미루고 있는 중이다. 그때까지는 수납 박스와 외장하드에 잘 모셔 두어야 한다.
서랍엔 개인적인 물건을 보관한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내가 아끼는 물건을 넣어 둔다. 그것들이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고 오래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는다. 그래서인지 서랍은 노랫말이나 문학, 예술 작품 등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 살바도르 달리는 서랍의 담는 특성을 사람의 마음에 빗대어 신체 부위 곳곳을 서랍으로 표현하는 회화, 조각 작품을 만들었다. 서은광이 부른 <서랍> 에선 '네 서랍을 열어 준다면 (내) 모든 걸 꺼내어 네 마음을 채워 주'겠다며 고백하고 있다. 서랍을 모티프로 한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나플라의 <서랍>이라는 곡이다.
서랍을 열었더니 식은 사랑밖에 이젠 안 보여
너 없으니 아무도 없어
...
지금 너와의 추억들 난 아직 간직해놔
사랑 다 식기 전까지 절대 못 내놔
가끔 서랍을 치우려 했던 생각들
버리기 전에 네가 보여서 버리지 못해 난
너와 함께한 일 우리 같이한 일
모든 게 이 서랍 안에 있어
우리 추억거리 우리 사랑들이
다 이 서랍 안에 있어
...
너 오기 전까지 이 서랍은 그대로
나플라 <서랍>
사람들은 빈 마음을 채우듯 빈 서랍을 채운다. 채우고 채우다 가득 차면 선택을 해야 한다. 새로운 서랍을 마련하거나 조금씩 비워내거나. 내 방 안의 서랍은 늘릴 수 있지만 내 마음 안의 서랍은 늘리기 어렵다. 가득 찬 마음은 버리고 비워내는 수밖에. 마음속 서랍을 뒤적이면 여러 기억이 떠오르고 진다. 웃고 울고 하다 보면 버릴 것과 남겨 둘 것이 구분된다. 버리려고 결정한 기억들. 막상 집어 들면 던져 버리는 게 쉽지만은 않다. 어느 것은 금방 놓을 수 있지만 어떤 것은 몇 년을 손에 쥐고 망설이게 한다. 내 방의 서랍을 정리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마음속의 서랍을 정리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