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onhyuk Aug 30. 2021

유형기

성장하지 못하는 것 같아 초조해질 때

공방 뒷마당엔 조그만 화단이 있다.

쓰레기와 덤불로 덮여 방치되어 있던 땅을 정리해 꾸민 것인데 여러 꽃, 덩굴, 콩, 수상식물, 나무까지 다양한 식물들이 모여있다.

그중 내 시선을 끌었던 것은 어린 나무들이었다.

아무래도 목재를 다루다 보니 나무에 더 눈길이 갔는지도 모른다.



어린 나무들이 그렇게 작은 줄 몰랐다.

'씨앗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아무리 나무라도 어릴 땐 작겠지'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작음을 직접 보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내 손바닥만도 못한 키에 줄기는 젓가락처럼 얇으니 누가 실수로 밟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단풍나무는 특히 눈길이 갔는데, 보면 웃음이 났기 때문이다.

웬만한 꽃줄기보다 얇은 비리비리한 몸통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자기 몸보다 훨씬 큰 단풍잎을 몇 개나 달고 있느냐 말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는 것 같은.

조그만 꼬맹이가 '나도 단풍나무야!'하고 말하는 것 같아 귀엽기도 했다.



어린 단풍나무
















봄이 지나 여름이 되고 장마가 시작되면서 화단의 식물들은 경주하듯 키를 키워갔다.

충분한 햇빛과 영양, 물이 주어지니 식물들은 무서우리만치 빠르게 성장했다.

특히 처음 씨앗을 심었을 때 싹을 금방 틔우지 않아 애태웠던 해바라기는 여름이 끝나갈 무렵, 내 키만큼 자라 있었다.

심지어 잡초마저도 내 무릎까지 자라곤 했는데 어린 나무들은 유난히 변화가 없었다.

봄철 모습 그대로 멈춘 것 같았다.



'뭐, 나무는 원래 천천히 자란다니까'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1, 2cm 정도는 커야 하는 것 아냐?' 하며 툴툴댔다.

왜 안 자라냐고 직접 물어볼 수도 없으니 그저 '알아서 자라겠지' 하고 내 일이나 하러 갔다.



그러던 얼마 전, 책을 읽다 우연히 나무들이 자라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그 챕터 이름이 '막 싹을 틔운 나무가 성장을 마다하는 이유'였다.




막 싹을 틔운 어린 나무가 생장을 마다하는 이유는 땅속의 뿌리 때문이다. 작은 잎에서 만들어 낸 소량의 영양분을 자라는 데 쓰지 않고 오직 뿌리를 키우는 데 쓴다. 눈에 보이는 생장보다는 자기 안의 힘을 다지는 데 집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비축하는 시기, 뿌리에 온 힘을 쏟는 시절을 '유형기'라고 한다.

(...) 그렇게 어두운 땅속에서 길을 트고 자리를 잡는 동안 실타래처럼 가는 뿌리는 튼튼하게 골격을 만들고 웬만한 가뭄은 너끈히 이겨 낼 근성을 갖춘다. (...) 유형기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하늘을 향해 줄기를 뻗기 시작한다. 짧지 않은 시간 뿌리에 힘을 쏟은 덕분에 세찬 바람과 폭우에도 굳건히 버틸 수 있는 성목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p.27)





그래. 이 조그만 나무들은 유형기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땅 위로는 조금도 자라지 않고 아래로 열심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앞으로 겪게 될 시련을 견디기 위해서.

더 튼튼히, 높이 자라기 위해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뎌 가구 만드는 일을 시작한 지 어느새 10개월이 지났다.

나름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지만 부족함을 느낄 때가 많다.

다른 이들이 키를 키우고 꽃을 피울 때,

스스로에게 화가 날 때,

금방 발전하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할 때,



이렇게 말하기로 했다.



'나는 아직 유형기잖아.'

이전 09화 목공은 겨울의 계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