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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안후라이안 Jul 08. 2020

책 덕후의 카페 호핑

책 읽으러 가는 게 아닐수록 더 좋은,

"폴 고갱 님,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스타벅스에 갈 때마다 나는 후기 인상파 화가(Paul Gauguin)가 된다. 스타벅스에서는 음료를 내어주면서 각자의 별명을 불러주는데, 별명 뒤에는 꼭 '고객님'을 붙인다(발음하면 [고갱님]이 된다). 여기에 약간의 유희를 덧붙이기로 했다. 이곳에서 나는 '폴'이다. 이윽고 '폴 고갱 님'이 호명되고, 커피를 가지러 가는 그 몇 미터 혹은 단 몇 분 사이. 나는 실없는 사람처럼 헤실헤실 웃고야 만다. 오직 나만 알고 나만 웃는, 아주 가벼운 농담이다.


스타벅스뿐만은 아니다. 커피도 좋아하고 차도 좋아하고 카페도 좋아하는 나는 정말 많은 카페를 드나들며 그 카페 고유의 분위기를 내 방식대로 즐기는 방법을 찾는 것을 낙으로 삼게 되었다. 굳이 손꼽을 만한 단골 카페도 웬만해서는 만들지 않는다. 그저 메뚜기처럼 폴짝폴짝 뛰어 새로운 카페를 찾아 옮겨 다닐 뿐. 카페 호핑은, 스무 살 때부터 시작된 서울 살이 적응기의 적절하고도 유용한 수단이었다.


고흐가 그린 아를르 포룸 광장의 카페테라스처럼, 앙드레 지드와 모파상과 파울 클레가 즐겨 찾던 튀니지의 카페 데나트(Cafe Des Nattes, 이곳에서 잣을 동동 띄운 민트차를 마시고 온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처럼. 일단 가기만 하면 이미 자리를 잡은 동네 친구들 몇몇이 손 흔들어 부르는 아지트 카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촘촘한 사무실에 박혀 일하다 주말에야 간신히 약속을 잡는 게 고작인 우리는 카페에 들어가서도 음료를 코로 마실 만큼 이야기하느라 바쁘다. 지지부진한 삶에 단 한 조각의 보상이라도 좋으니 얹어주고 싶을 때. 나는 인적이 드문 곳에 꽁꽁 숨어있는, 책이 있는 카페에 작정하고 찾아가곤 한다. 그곳에서는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작가들이 자신들 책장을 펄럭이며 나를 반갑게 불러준다.


굳이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책이 눈에 밟히고 발에 밟히는데도, 나는 이렇게 책이 많은 카페를 부러 찾아다닌다. 빛바래고 오래된 책에서 나는 구수한 비스킷 냄새에 둘러싸여 있을 때면 느낄 수 있는 묘한 안도감을 좋아한다. 누군가가 애써 고르고 애써 정리해둔 책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새로 나온 책 위주로 보여주려는 서점과는 달리, 지금껏 알지 못했던 책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다. 나만 알기에는 아까워, 책이 있는 카페 세 군데를 모아봤다.



카페 시집

카페 시집. 재봉틀을 테이블로 수리해 사용하는, 1인을 위한 자리(좌)와 따뜻한 사과차(우). (c) 2019. 아이후(ihoo) all rights resrerved.

'카페 시집'에는 파격이 가득하다. 시집에서 찢어낸 낱장 종이들이 마른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질 않나, 주문한 음료 아래에 깔려 있질 않나.... 책은 찢으면 안 돼, 더럽혀서는 안 돼, 하며 착하고 성실하게 가치관을 정립해온 사람들을 멘붕에 빠뜨린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걸! 그날의 운세를 점치듯, 사과차에 딸려 나온 낱장 시를 읽는다. 여기저기 테이블마다에는 시집도 몇 권인가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낡은 가구를 다시 손봐 꾸며둔 공간에서라면 제법 시 읽을 맛이 난달까. 심지어는 드립 커피와 수제 차 이름도 시적이다.   



지하 서재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바라본 카페 모습(좌)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원서를 모아둔 책장 한켠(우). (c) 2020. 아이후(ihoo) all rights reserved.
땅콩이 따라나오는 지하 서재 수제 생맥주(좌)와 천장 쪽으로 낸 창으로 바라다보이는 바깥 풍경(우). (c) 2020. 아이후(ihoo) all rights reserved.

'지하 서재'는 정릉에 있는 카페 겸 펍이다. 1층에서 주문하고 내려가면, 아, 나도 이렇게 서재를 꾸며놓고 싶다, 하는 부러움이 몽글몽글 솟아난다.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협소 건물. 낮에는 아버지가, 밤에는 아들이 묶은 머리에 모자를 눌러쓴 똑같은 모습으로 카운터를 지킨다. 내가 뽑아 든 책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 1995년판 원서였다. 몇 장을 뒤적이고는 도로 꽂아놓았다(다시 말하지만, 이런 곳에는 책을 읽으러 오는 게 아니다). 평일 낮 시간에는 제법 한가해 전세를 낸 것처럼 앉아 있을 수도 있다.  



토끼의 지혜

토끼가 그려진 자바재킷과 토끼의 지혜에서 고른 책 두 권(좌), 테이블에 앉아 바라본 카페 모습(우). (c) 2019. 아이후(ihoo) all rights reserved.

웬만한 소규모 서점보다 책이 더 많다. 책도 많고 콘센트도 많아 노트북 들고 작업하러 가기에도 좋고, 만화방 가듯 가벼운 기분으로 어슬렁어슬렁 책 읽으러 가기에도 좋다. '대화 공간'과 '조용히 공부하는 공간'이 따로 있으니 사람 만나기에도 좋겠다. 중고서적도 팔고 있어서 읽던 책을 그대로 구입해올 수도 있다. 민음사 북클럽 회원이라면 할인도 받을 수 있다(카페 한편에 민음사 책만 따로 모아둔 곳도 있다). 약간의 비용을 추가하면 커피도 더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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