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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발 Oct 12. 2020

낮달은 납작 바삭한 새우칩처럼

달을 쫓는 아이 2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 해가 이미 홀딱 넘어가려던 참이나 되어서였다. 같이 영화나 보러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더니 점심도 먹고, 차도 마시잔다. 그러고도 파하자는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두 사람이 나눌 얘기도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 나는 묘한 불안감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하다 입을 연다.


"우리 이제 일어날까? 저녁에는 약속이 있어."

맞은편에 앉은 의 표정이 우울하다. 다시 한번, 내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기분이 들지만 모르는 척한다. 고민해봤자 나는 답을 찾지 못할 테니.



지하철 역에 를 바래다주고 혼자가 된 나는 쏜살처럼 뛴다. 애인들을 만나러 갈 거다.

그이들은 생김새도, 나이도, 성격 제각각이다. 아주 오래 사귀어온 이도 있고, 최근에 좋아하게 된 이도 있다. 이 분야에서라면 나도 편력이 심한 편이었다. 성별조차 가리지 않으니까.


책장을 펼치면 입체 카드처럼 몸을 일으키며 나와 마주하는 사람들. 대형 서점에 꽂힌 수많은 책장으로 휘리릭 넘어가는,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작가와 주인공들.


낮달은 자주 걷는 사람 눈에만 띈다. (c) 2020. 아이후(ihoo) all rights reserved.






취재 나가는 날보다 사무실에 붙박여 근무하는 날이 많던 직장인 시절. 이따금 거래처와 회의하려고 들어서는 한낮의 도시 한복판은 낯설었다.


햇살은 눈이 아리게 부셔오고 바람은 가로수를 익숙하게 쓰다듬고 흙냄새는 코를 찌르듯 날카로웠다. 사람들은 여유 있는 몸짓을 흘리는 와중에 나 홀로 이방인처럼 멀거니 서있곤 했다.

우연찮게 낮달이라도 발견하기 전까지는.



나는 모호한 것을 좋아다. 경계가 흐릿해 이쪽이든 저쪽이든 쉽게 섞여들 수 있는 것. 자주 모습을 바꾸며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것. 뾰족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것. 이 모든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패턴을 갖추어 헷갈리지 않게 하는 것.


낮달이 꼭 그랬다. 사람들은 낮과 밤의 상징으로 해와 달을 꼽지만, 이 둘은 낮이나 밤이나 지구 곁에 있다.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해가 기운이 달려 늘어지는 날에는 달이 슬쩍 따라 나왔다. 납작하고 바삭한 새우칩처럼 낮달은 희미하고 은은했다.


해와 달을 함께 볼 수 있는 하늘은 호젓했다. 나는 잠깐 내 삶에 안도할 수 있었다.



낮달은 기형도에게서 배운 줄로 알았다. 안개며 진눈깨비며 가는 비며 달이며 폭풍이며.... 천체와 일기는 그의 특별한 관심사였다. 그가 헤아리는, 평범한 사람의 슬픔이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스님(한용운, <님의 침묵>)한테, '자아 그러지 말고 오늘 허락을 하렴' 학교 선생님(나도향, <물레방아>)한테서 배웠건만, 기형도는 그보다 나쁜 애인이었다.


나는 '묵은 신문(<소리 1>)'을 쓰는 기자였던 그를 만나 툭하면 울었다. 눈이 비치기 시작하는 겨울 한날에는 습관처럼 기형도를 펴놓고 울었다. 서른 번은 족히 돌려봤음 직한 낱장 시는 언제나 서글펐다. 그는 내게 '가는 비... 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가는 비 온다)>'이라는 죽음을,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희망을 알려줬다. 낮달은 응당 그에게서 배운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가 아니었다.






낮달이 '내 목숨이 서서히 무너지고 싶은 곳'이라 말한 것은 PD(문태준, <낮달의 비유>)였다. 내게 낮달을 알려준 건 그이? 음, 잘 모르겠다.



낮달에 대해 쓰려고, 평소보다 일찍 기형도를 꺼내 평소처럼 울며 읽었다(이게 웬 청승인지). 세상을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둥근 모습으로 해석하는 내게,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처럼 떠 (<백야>)'고, '공기는 푸른 유리병(<어느 푸른 저녁>)' 같다는 또 다른 눈빛을 내어 포개준 애인.


긴긴 만남이 이어져도 서점으로 도망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랐는데도, 이따금 홀린 듯 찾아오는 새까만 밤을 남몰래 함께하고 싶은 애인. 소중한 낮달을 내게 알려준 줄로만 착각했던 애인. 그런 내 오랜 애인.   


낮달은 새우칩처럼 뜨고(왼쪽), 새우칩은 베트남 요리 위에 장식으로 나오기도 한다(오른쪽). (c) 2020. 2019. 아이후(ihoo)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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