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긴 하루를 끄덕끄덕 버티고 집으로 돌아오는 때가 있다. 내려야 할 역을 놓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가 다시 놓치는 그런 하루.
가로등 불빛에 늘어질 대로 늘어진 긴긴 그림자를 바라보며, 그림자를 붙이려 비누칠을 했다는 피터팬을 떠올린다. 거품이 나겠지, 보글보글. 떨어질 리 없는 그림자 대신 실없는 생각을 이어 붙이며 적막한 어둠을 가까스로 털어내는 밤. 현관문을 닫자 비로소 끄덕끄덕 버틴 하루도 빈틈없이 닫힌다.
이런 날에는 현관 센서등 하나에만 의지해 방으로 들어가, 불도 켜지 않고 그대로 벽에 기댄 채 몸을 무너뜨린다. 반가운 어둠 속에서 익숙한 물건들이 희미한 형체를 드러낸다. 눈을 감아도, 떠도 온통 새까만 어둠 뿐. 곁에는 소란스러운 침묵만 남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침묵을 쪼갠 틈을 비집고 작은 소리 한 가닥이 고개를 내민다. 예민한 더듬이로 공기의 지척을 헤아리는 생명체. 누군가를 향해 끊임없이 내지르는 반복적인 아우성.
"들리니? 나 여기 있어. 나 이렇게 너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너를 기다리고 있어.... "
나를 부르는 소리가 아닌 걸 잘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하며 거리로 나선다. 보통 때라면 즐겨 듣는 음악 여러 곡을 반복 재생하며 모든 소리와 공기를 차단했겠지만, 이번에는 이 모든 소리와 공기에 맞춰 함께 들썩이려 한다.
한낮 볕에 그은 수풀은, 어둠 속에서 축축하고 구수한 건초 냄새를 풍겨온다. 사이, 무른 공기의 부피를 부유하는 가을 풀벌레 소리. 귀뚜라미며 방울벌레며 베짱이며 여치며, 여기에 이름 모를 온갖 벌레들이 저마다에 마땅한 풀 위에 앉아 온 밤을 갉작이고 있다. 찌르르르, 쓰르르르....
단단한 침묵 속에서만 반짝이는 소리가 있다. 눈 감고 귀 기울이면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들, 작은 생명들의 들숨과 날숨들. 마스크를 고쳐 쓰며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에는 풀벌레 소리를 닮은 리듬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내 속에서 소란스럽던 침묵이 이제 더는 들리지 않는다. 대신 스치는 모든 이들의 말소리가 도란도란 은은하고 따뜻하다. 가을 풀벌레 소리와 박자를 맞추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이 모든 소리를 이제야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저 어둠 속을 헤매려 이어폰을 들고 나오지 않았을 뿐인데.
동네 공원에 사는 고양이 두 마리. 언제나 저렇게 등을 돌리고 앉아있다. 볼륨을 키워야 풀벌레가 운다. (c) 2020. 아이후(ihoo) all rights reserved.
* 제목 '침묵의 소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사이먼 앤드 가펑클(Simon and Garfunkle)의 노래 제목 <Sound of Silence>에서 따왔다.
* 여름과 가을 사이에 구상해뒀던 글인데, 이제야 쓸 수 있게 되었다. 신기하기도 하지. 가을벌레들은 여름의 한가운데에서부터 불쑥 소리를 발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