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 아빠가 사준 CD플레이어는 지금 생각해도 흥미롭다. 몸체 양쪽으로 스피커가 분리되어 있고, CD플레이어는 그 가운데 붙어있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일명 워크맨)를 따로 분리해 휴대할 수 있다는 것. 그걸 떼서 학교에 가지고 다니며 영어랑 국어 듣기 평가 문제도 풀고, 자습하거나 등하교하며 팝송을 듣기도 했다.
이 녀석은 집에 두고 서울로 올라왔기에 한동안 음악 듣기가 영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집에 돌아와 데스크톱과 스피커를 연결해 음악을 듣는 게 전부였다. 답답했던 나는 첫 아르바이트 월급을 받자마자 곧장 용산 전자상가로 달려갔다. 케이스 윗부분이 투명해서 CD가 뱅글뱅글 도는 걸 눈으로 볼 수 있는 걸로 골랐다. 눈으로도 음악을 듣는 듯했다.
그러다 얼마 안 있으니 MP3 플레이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껌 한 통 정도 되는 크기라 목에 걸 수 있었다. 그때는 그게 꽤 힙한 대학생의 상징이었다. 나는 또 아르바이트를 한 돈으로 냉큼 MP3 플레이어를 샀다. 이번엔 인터넷으로 사고 배송받았다. 좋아하는 음악을 소리바다에서 다운로드해 MP3로 처음 옮기던 그때의 그 기분이란!
이사한답시고 물건을 정리한다면서 한동안 이렇게 추억놀이에 퐁당퐁당 빠져있었다.
보물 찾기가 따로 없었다. 오래된 일기장, 친구들이 보내준 엽서와 편지, 못다 버린 옛 남자 친구의 편지(그때는 러브레터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반성문), 필름으로 인화한 우스꽝스러운 사진과 학교 다니면서 받은 상패들.... 재미있는 물건을 발견할 때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옛날을 두리번거렸다. 지나고 보니 그때 참 행복했었구나 싶었다. 지나고 나면 지금 이 순간도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되겠지.
왼쪽은 비틀스의 <1(One)>, 오른쪽은 <애비로드(Abbey Road)> 앨범 커버.
책장 맨 꼭대기에는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두곤 했다. 깨금발을 들어야 손이 닿는 자리. 쓰지는 않으나 버리자니 주저하게 되는 물건들을 두기에 딱이었다. 다행히(?!) CD 플레이어는 모두 버렸지만, MP3플레이어는 한 개 남아있었다. 스물한 살에 촬영한 6mm 단편영화 필름과 좋아하는 영상을 떠둔 비디오테이프와 MP3 플레이어가 나오기 전에 산 CD 같은 것들. 이제는 모두 놓아주어야 할 때였다.
유독 재킷이 닳고 낡은 CD도 있었다. 비틀스다.
내게는 무슨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듯 매년 비슷한 시기에 반복하는 연례행사가 있다. 무더위에 지쳐 첫얼음을 얼리는 날에는 보사노바를 틀고, 첫눈이 오는 날이면 기형도를 펼친다. 이따금 대청소를 하는 날이면 비틀스의 편집 앨범 < 1(One)>을 걸고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따라 부르는 일도 그중 하나다.
"All you need is love. Love is all you need."
필요한 게 오직 사랑이라니! 존 레넌을 뛰어넘는 로맨티스트가 세상에 또 있을까. 연애감정에 유독 긴장하던 대학생 때는 이 노래만 들어도 설레곤 했다. 특히, 마지막에 <She loves you>란 곡의 한 소절이 살짝 엿보이는 대목에서는 그야말로 설렘이 팡팡 터져버렸다. 네게는 사랑이 필요하고, 그녀는 너를 사랑해. 여기서 부족한 게 무어겠는가.
책장이 없어서 줄곧 이삿짐 센터 아저씨가 눕힌 대로 누워있는 책들. 조만간 책 얘기를 하겠다고 다짐하며. (c) 2020. 아이후(ihoo) all rights reserved.
비틀스에 대한 추억으로는 초등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엄마한테서 처음 배운 <Yesterday>. 엄마는 티브이에서 잠깐 노래가 흘러나오면 따라 부르곤 했는데,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던 것 같다. "예스터데이, 올 마이 트러블스 심 소 팔 어웨이." 엄마가 한글로 적어준 가사를 따라 열심히 연습하던 꼬맹이가 거기에 있다.
한참 이렇게 추억을 소환하며 과거로 여행을 하다 보니, 리듬에 몸을 맞춰 흐느적거리고 싶었다. 거대한 스피커가 드럼 비트에 맞춰 발 디딘 바닥까지 두근거리게 만들 텐데. 혹은 사람들과 한마음으로 목이 쉴 때까지 떼창을 하고 싶었다. 가수와 밴드와 곁에 선 모든 이들과 이 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묘한 착각을 경험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아쉬워하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던 오래된 노트북을 꺼내 CD를 걸었다. 첫 곡은 <Love me 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