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듈락(Edmund Dulac),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 1911)>
네가 뭘 원하는지 알지. 그건 어리석은 짓이야. 하지만 넌 네 고집대로 할 테고 결국은 후회하게 될걸, 꼬마 공주님.
20년 물밥의 위엄
오래도록 저녁반 수영을 다니다 아침반으로 옮기게 됐다. 저녁 연수반 수업에 가까스로 적응했을 때였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수영장에는 '연수반'이 있다. 상급반이 고이면 연수반으로 이름을 바꿔줄 뿐, 특별한 것은 없다(다만 연수반 사람들이 수린이에게 한마디씩 영법에 훈수를 두며 우쭐할 뿐). 그때 아침 7시 연수반은 두 레인을 쓰고 있었다. 아침반과 저녁반을 모두 담당하던 선생님이 나를 발견하고는 당황한 얼굴로 그중 실력이 덜한 레인으로 넣어주며 말했다. "아침반 분들이 워낙 잘하셔서.... 우선 해보고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나름 실력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못 따라갈 수 있다고?! 으악!
내가 들어간 레인의 평균 연령은 아마 65세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첫 수업 이후 한참 지난 지금도 그분들의 나이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성난 근육이 붙은 탄탄한 팔다리와 그렇지 못한 동그란 통통배(띄어쓰기에 따라 뜻이 달라질 수 있다), 호기심에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30여 개의 귀여운 눈을 아직도 기억한다. 호기롭게 맨 뒤에 서서 자유형부터 따라가는데, 아이고, 나 죽겠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몇 바퀴씩은 아예 따라가지 못하고 쉬어야 했다. 30대 나이(그때 나이다)의 꼬꼬마는 매일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았다.
이렇게 수영장에서 만난 '언니들'은 수영장 다니는 재미를 더 착 붙여줬다. 이제껏 첫째로 살아왔는데 십수 명 언니들의 막내가 되어버린 거다. 열 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고, 가장 연장자인 언니는 우리 엄마보다 한두 살 많을 정도. 처음 볼 때는 여기저기 우리 딸이라 소개하고 다니시더니, 뭐라고 부를까요, 하고 물으니 '언니'라고 부르란다. 잠깐 동공 대지진을 겪었지만 회사 노예 짬이 붙은 나는 '언니'라는 호칭을 입에 문 나뭇잎처럼 부르며 따랐다. 처음에는 물에 사는 마녀처럼 무섭게만 보이던 그 많은 언니들에게(분명 텃세가 있는 수영장도 있다) 매일같이 예쁨 받는 막내가 되는 호사를 내가 또 언제 누릴 수 있을까.
마녀는 분명 인어 공주를 말렸다
"아무튼 때맞춰 잘 왔다. 내일 해가 떠오르면, 1년 동안은 널 도울 수 없을 테니까 말야."
마녀는 인어 공주와 거래하는 것을 '돕는다'라고 표현한다. 원하는 것을 얻게 해주겠단 뜻이니, 결국은 돕는 것일 수도 있겠다. 마녀는 분명 인어 공주를 말렸다. 물거품을 운운하는데도 고집을 부린 건 오히려 인어 공주 쪽이다. 마녀는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진정한 악한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수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영을 한 기간은 '수력'이라거나 '물밥'이란 말을 사용해 실력을 구분한다. 수영장 언니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언니의 수력은 그때 당시 20년이라고 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20년이나 한결같이 같은 시각에 같은 수영장에 나오는 그의 성실함에 놀랐다. 나중에는 손가락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그 언니가 수영을 50대 들어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고 더 깜짝 놀랐다. 언젠가 수영 실력은 50세 이전까지는 꾸준히 늘릴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50세 이후부터는 기존 실력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주춤해진다는 뜻일 게다. 왕언니는 애초에 50대에 수영장에 첫발을 들였다. 아마 20년 내내 꾸준히 늘었을 테다. 나 같은 수력 꼬맹이를 단번에 눌러버릴 만큼.
하고 싶다는 뜻만 있다면 늦은 나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아니오. 나는 그때 이런 대답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