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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발 Oct 26. 2024

두근반세근반

졸지에 다이어트라니

에드먼드 듈락(Edmund Dulac), <진주의 왕국(The Kingdom of the Pearl, 1920)>



그때 언니들이 물 위로 떠올랐다. 언니들도 인어 공주처럼 창백하고 슬픈 표정이었다. 그런데 바람에 나부끼던 길고 아름다운 언니들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널 구해 달라고 우리 머리카락을 잘라 마녀에게 주었단다."



부표가 없는 곳에선 선배를 따라야


어깨가 아파서 매일 수영할 수는 없었지만, 갑자기 불어닥친 더위를 피해 밤마다 따릉이를 빌려 타거나 걸으며 남는 체력을 소진하기 위해 애썼다. 그래야 불안함으로 퐁당 빠지려는 생각의 흐름을 동강동강 잘라낼 수 있으니까. 낮에는 의사 선생님이 적극 권장한, 목에 걸어 팔을 ㄴ(니은) 자로 지지하는 5천 원짜리 팔걸이? 지지대? 이름은 모르겠지만 무슨 그런 의료기구를 걸치고서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쏘다녔다.

"회사 사람들한테 힘든 일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아픈 거 티 내기도 좋고..."

그의 마케팅 기술은 실로 그럴싸했지만, 그때 나는 막 퇴사한 직후였다. 아픈 거 티 내도 봐줄 사람이 없어요, 하고 말하는 대신 힘없이 웃으며 사겠다고 했다. 어쨌든 어깨를 안 움직일수록 빨리 나을 거랬으니까. 그렇게 한 달을 흥청망청 소모해 나갔다. 몸 회복은 생각보다 더뎠지만 마음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요즘 잘 지내? 어깨는? 나중에 바수(바다 수영)하고 싶으면 같이 가자."

동호회 1번 자매 언니들 중 동생 언니가 물었다(언니는 삼 남매 중 막내고, 그래서 좀 귀여우니까 이제부터 큐언니라고 써보겠다).

"상태 궁금해서 자수(경찰서에 가는 건 아니고 자유 수영) 다녀왔어요. 쓰면 무조건 아프더라고요."

언니들은 같은 수영장에 다니는 분들과 함께 어떤 때는 바다, 어떤 때는 한강으로 거의 매주 수영을 나가고 있다고 했다. 삼척 대회에 가기 전에 한 번은 꼭 미리 강이나 바다에 나가보고 싶었다. 겁쟁이는 가능한 한 많은 변수를 계산해 감안해 두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때까지는 나아야 할 텐데. 내 맘도 모르고 큐언니가 재촉했다.

"슈트부터 사!"


삼척에는 못 가게 될 수도 있지만 장비도 구비해야 했다. 웻슈트는 온라인 수영카페 공구가 기준으로 56만 원짜리가 최상품이었다. 같은 브랜드에서 나오는 가장 저렴한 버전이 사이트마다 다르지만 대략 10만 원가량. 언니들은 처음에 저렴이 버전을 입고 구봉도에 다녀왔는데, 영 시원찮더라고 했다.

"두목님이랑 은행아저씨 다 그거 입어. 너도 그거 사. 10년 정도 입는대."

딱 한 번 입을 수도 있는데 백수가 56만 원을 척, 하고 쓰기에는 과했다(나 빼놓고 다들 부자야). 장비를 사들이는 비용에 참가비와 기타 경비까지 감안하면 거의 100만 원이 사라진다. 게다가 퇴사하면 글을 쓰겠다며 성능 좋은 노트북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한참 고민하다 내가 추위를 많이 탄다는 것과 초보라는 것과 몸이 잘 뜨지 않는다는 것을 반영해 두툼한 초보용 웻슈트를 안전부이까지 껴서 30만 원에 사기로 결정했다. 와, 나 이렇게 거금 썼는데 진짜 못 가게 되는 건 아니겠지?



인어공주를 돕는 마음씨 고운 언니들


인어공주가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해 물거품이 될 운명 앞에 놓였을 때, 언니 넷은 그를 구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동강 자른다(무모한 짝사랑이 이렇게 위험하다). 내가 동호회 사람들에게, 특히 큐언니에게 의지해서 이런저런 정보를 얻지 못했다면 아마 나는 오픈워터는 꿈도 못 꾸었겠지? 부표나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경험 많은 선배를 따라가면 된다. 그러니까 인어공주야, 너도 어서 언니들 말을 따르렴(아, 그럼 이게 살인을 조장하게 되는 거니까 조언하면 안 되는 걸까?).


큰일 났다! 거금을 주고 산 웻슈트가 잘 들어가지 않았다. 두 다리와 양팔은 겨우겨우 욱여넣었는데 어깨와 등은 지퍼를 채울 엄두도 나지 않았다. 진땀을 한 바가지 쏟아내고, 그 상태로 그냥 벗어던져버렸다. 아마 나를 너무 과소(?) 평가한 듯했다. 키와 몸무게를 감안하면, 나는 여성용 M과 L의 딱 중간 사이즈 몸이었다. 키도 크고 어깨와 승모도 웅장한 편이지만 수영복을 제일 작은 치수로 입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사이즈로 사는 게 나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판매자와 직접 전화 통화하며 들었던 그 경고가 불현듯 떠올랐다. "고객님은 딱 중간 사이즈거든요. M사이즈 사실 거면 2kg 정도 빼고 입으세요."

그날 밤 마트에 들러 고기 코너에서 팩에 든 삼겹살을 고르다 경악하고야 말았다. 세근 반이면 이런 큰 덩어리를 내 몸에서 빼내야 한단 거로구나! 이것 참 심장 떨리네. 두근반세근반.


과연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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