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돌에 시작한 육아일지] 말이 중요한 게 아니었어!
2호야,
요즘 다시 '어버버'하며 말을 더듬는구나. 그럴 때 네 모습은 약간 답답하고 속상해 보여. 옆에서 1호가 속사포로 이야기를 해대니 더 짜증 나지? 엄마의 관심을 빼앗기는 것 같고.
넌 말이 빠른 편이 아니었어. 두 돌이 지났는데도 별 말이 없어서 솔직히 좀 걱정했지. 불안이 엄습하는 새벽이면 센터나 병원 같은 곳을 검색해보기도 했어. 그래도 다행히 엄마 아빠가 하는 말을 곧잘 알아듣고 행동하니까 기다릴 수 있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설거지 해놓은 그릇을 정리하느라 엄마의 시선이 너희와 싱크대 수납장을 오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들렸어.
내가 갖고 놀고 있었는데 가져가서 속상해
아니 지금 누가 말한 거지? 아빠는 씻고 있고, 거실엔 너희랑 엄마뿐인데! 발음이 정확하진 않았지만 감정이 담긴 저 문장은 네가 말한 거였어. 네 장난감을 1호가 가져가서 속상함이 차올랐고, 그게 말문까지 터뜨렸나 봐.
그 후로도 넌 말이 많진 않았지만 마음을 잘 표현했단다. 하루는 서울 할머니 할아버지 만나고 오는 길에 '서울 할아버지 싫어'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엄마가 '왜에? 할아버지는 엄마의 아빠인데, 왜 싫은 거야?'라고 물어봤지. 그러자 이렇게 말했어.
할아버지는 말을 밉게 해
엄마는 순간 깔깔 웃어버렸어. 그 말이 너무 맞다고 생각했거든. 엄마는 할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조금 서운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있었는데 왜 그런지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어. 그런데 네가 '말을 밉게 해서'라고 아주 시원하게 설명해 준 거야. 엄마 맘을 알아주는 내 편이 생긴 것 같아서 엄청 든든했어. 네가 말없이 있어도 사람들의 말투나 감정에 열려있구나 싶어 다행이었고 말이야.
아차 싶어서 웃음을 멈추고 '그랬구나.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불편했어?'라고 마음을 물어봐줬지만 사실 엄마의 통쾌함은 꽤 오래갔단다. '봐~ 애들도 다 알잖아'라며 할아버지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 정도였다니까.
근데 엄마는 왜 할아버지가 말을 밉게 하시는지 이제 조금 알 거 같아. 어떻게 다르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시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평생 따뜻하고 예쁜 말을 많이 들어보지 않고 사셔서. 그렇게 생각하니 할아버지가 약간 안쓰럽고, 그렇게라도 마음을 표현해주시는 게 고맙기도 해. 그래서 엄마부터 할아버지에게 따뜻한 말을 들려드리고 싶어. 아주 술술 되진 않고 조금 애를 써야 하거든? 그래도 해보려고. 너도 나중에 혹시 그럴 마음이 생기면 같이 하자. 엄마는 할아버지가 그때까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랄 뿐야.
말이 마음 같이 안 나오는 날이 조금 이어질 거야. 전에도 그랬었거든. 그런데 몇 주 지나니 갑자기 술술 말하더라. 그래서 엄마는 걱정하지 않아.
요즘 다시 어버버 하는 건 아마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잘 이야기하고 싶어서일 거야. 여러 생각과 감정이 말로 몽글몽글 빚어져서 너의 혀와 성대를 통해 터져 나오기 위한 시간이란다.
넌 이미 자기 마음을 잘 알고, 표현해야 할 때 솔직하고 용감하게 잘 표현하니까 조금 천천히 말해도 괜찮아. 엄마는 잘 듣기 위해 기다릴게. 너무 티는 안 낼게. 대놓고 기다리면 네가 자존심 상해하는 것 같더라. 다만 너의 어버버도 엄마가 사랑한다는 거 잊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