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럽게 스펙타클

[세 돌에 시작하는 육아일지]

by 이진희

지금은 2022년 10월 10일 새벽 4시야. 너희가 굴러다니며 자다가 엄마의 배와 얼굴을 하도 차대서 잠이 깨고 말았어. 그래서 손에 집히는 책을 펼쳐 들었는데 마침 쓴 지 40년이 지난 육아일기였단다. 제목은 '빅토리 노트'야. 고작 생후 6개월 정도까지만 읽었는데 몸과 마음이 움직여서 이렇게 모니터 앞에 앉게 되었어. '아!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써야겠다'는 결심이 섰거든.


다행히 요즘 엄마와 아빠는 뭘 결심하면 바로바로 실행하는 분위기라 이게 가능한 것 같아. 오늘 너희가 낮잠 자는 동안엔 갑자기 제주도에 꽂혀서 항공권이며 숙소며 렌터카를 빛의 속도로 예약했단다. 막 예약을 마치고 '이제 넷플릭스 보며 좀 쉬어볼까'하는 참에 너희가 깨서 엄마 품 안에 달려들었어. (휴식 끝 육아 시작)


지금까지 너희에 대한 기록을 영 안 남긴 것은 아니야. 재주가 별로 없지만 영상도 찍어보고, 글도 남겼지만 엄마의 습성인지 시간이 지나고 뭔가 가슴에 뭉쳐지면 그걸 남기는 식인 데다가 대부분 다른 양육자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였어. 그래서 정작 너희에게 하는 이야기는 별로 없었어.

그나마 매일의 기록은 사진이야. 너무 많이 찍어서 얼마 전 아이클라우드 패밀리 계정을 2테라로 업그레이드했단다. 다른 건 가급적 틈틈이 줄이고 추려서 정해진 범위 안에서 유지하려고 노력하는데 너희 사진과 영상만은 어떻게 지울 수가 없더라.


엄마는 이 글을 브런치에 올리려고 해. 그래야 좀 더 꾸준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혹시 훗날 '나는 왜 이리 의지가 약한가' 고민이 될 때면, 엄마가 좋은 구실이 되어줄게. 너희의 의지박약은 다 엄마의 유전자 때문이야. 엄만 운동이든 식이조절이든 애써 계속해야 하는 일은 어느 하나 쉽지 않아. 아주 사소한 핑계라도 찾아서 그만두고 피하고 싶어. 요즘 엄마의 고민이기도 해. 그나마 찾은 방법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서 겨우 나아가는 거야. 일단 내가 육아일기를 쓰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나면 멈추는 게 민망해서라도 계속하지 않을까? 이런 바람을 담아 여기저기 뿌려 놓으려고. 미리 양해를 구할게.


일기라기엔 거창할 것 같아 '일지(Journal)'로 쓰려고 해. 얼마 전까지 너희가 둘 다 잘 자주고, 엄마 아빠의 체력도 남은 귀한 새벽에 틈틈이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봤거든. (16편을 보는데 반년이 걸렸으니 그런 새벽이 흔치 않았다는 건 짐작할 수 있지?) 그리고 엄마가 공부하는 비폭력대화로도 일지를 쓰고 있어서 일기보단 일지가 엄마에겐 한결 익숙해.


벼락치기로 지난 3년을 주르륵 훑고 싶지만 꾹 참고 첫 일지는 마무리할게. 내일, 아니 오늘은 월요일이지만 휴일이라서 너희와 하루 종일 함께 보낼 수 있거든. 그게 엄마 아빠의 가장 큰 즐거움이지만 또 만만치 않은 일이기도 하단다. 너희가 요즘 얼마나 고래고래 큰 목소리로 노래 부르고 뛰어다니고 말썽을 부리는지 상상도 못 할 거야 정말. 어제 비가 와서 하루 종일 집에 있었더니 밤 11시에도 기운이 넘치더라.


오늘은 너희가 눈 뜨자마자 함께 아침을 먹고 밖에 나갈 생각이야. 맘껏 달리고 노래 부르고 웃고 떠들자. 물론 외출에 협조해 줄지 의문이지만 엄마 바람은 그렇다는 거야. 그러자면 조금이라도 더 자는 게 좋겠어.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엄마는 나이가 꽤 많고 체력이랄 게 없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그럼 다음 글에서 또 만나자. 9시까지 푹 자고 일어 나주면 좋겠어. 사랑해.


*제목을 짓는 일은 늘 어려워. 오늘 일지의 제목은 낮에 아빠가 혼자 조그맣게 읊조린 말인데 엄마가 옆에 있다 들어버렸어. 오늘뿐 아니라 너희와 보낸 시간을 잘 설명해주는 것 같아서 고민 없이 붙였어. 표준어는 '더럽게 스펙터클'이라는데 아빠의 입말을 그대로 옮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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