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쌍 Mar 24. 2021

벚꽃을 서른 번 보면 할머니가 되는 건가?

노트북의 수명

  아침 일찍 서둘러 노트북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작년 가을 말도 없이 멈춰버린 노트북을 다시 쓸 수 있을지 알고 싶어서였다. 노트북은 켜진 상태에서 갑자기 꺼져버렸다. 그 후로도 깜빡깜빡거리더니 영영 부팅을 하지 못했다. 잠시 미뤄두었던 노트북의 수명진단을 위해 서비스 센터 갔다. 고장 났으니 수리비용은 당연히 나오겠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복구 불가라는 진단이 나올까 봐 걱정이 되었다.


 최근에 수리가 안된다고 정리된 가전들이 좀 있었다. 15년이 넘은 전자레인지는 수리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전자레인지만큼 오래된 세탁기는 추운 겨울날 주인의 부주의로 망가졌다. 그리고 어머니가 쓰시던 김치냉장고는 전원이 꺼졌다 켜졌다를 며칠 하더니 한쪽이 꺼져버렸다. 결국 이사를 하는 핑계로 폐가전 수거 신청을 했다. 모든 일이 지난겨울 동안 일어났다.

  오래 쓴 전자제품들은 즐겨 입는 옷인 듯 늘 익숙했다. 하지만 수명이 다되고 나니 수리를 거부당하거나  부속품이 더는 만들어지지 않는 퇴물이 되었다. 하나같이 십 년이 넘었다며 직원들은 손사래를 치 나를 설득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게 잘 쓴 것이라며 덧붙였다.

  십 년이 그렇게 긴 세월인가? 물론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뽕나무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된다는 사자성어도  있다. 요즘 같은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하는 정도가 아니라 산이든 강이든 그리고 바다에도 고층빌딩을 짓고 남을 정도의 세상이 되었다.  


  노트북은 메인보드가 문제인데 새 부품은 재고가 있지만 권하고 싶지 않고, 반값으로 중고 부품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부품을 갈아도 1년 길어야 2년을 버틸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차라리 수리비로 중고품을 사도 쓸 수 있을 거라며 나를 설득했다. 2008년에 쓰기 시작한 노트북은 12년이 되었고 그 정도면 충분히 잘 썼다며 나를 단념시켰다. 십 년이 넘은 늙어버린 전자제품들에게 하나같이 충분히 쓴 거라고 말했다. 새 전자제품을 살 때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지는 않는데 말이다.

제비꽃과 민들레@songyiflower 인스타그램

 돌아오는 길에 제비꽃들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길가에 민들레도 소리 없이 노란 점을 그리며 따라온다. 켜지지도 않는 노트북을 들고 집으로 오는데 참 능력 없는 주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12년이라면... 봄이 12번 왔다 갔다는  긴 시간을 의미했다.


 집 앞에 도착하니 보도블록 위에 벚꽃잎들이 떨어져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벚꽃들이 피고, 어느새 꽃비로 내리고 있었다. 핀 것도 못 봤는데 벌써 벚꽃 엔딩이라 아쉬웠다.  키 작은 꽃을 보느라 키가 큰 벚나무들을 보지 못했다.


   아름다운 글을 남기신 피천득 작가의 <인연>이란 유명한 수필집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또 한 해가 가는구나 세월이 빨라서가 아니라 인생이 유한하여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새색시가 김장 삼십 번만 담그면 할머니가 되고 마는 인생. 우리가 언제까지나 살 수 있다면 시간의 흐름은 그다지 애석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 <인연> 피천득 수필집 중에서

   그런데 김장 삼십 번에 할머니가 된다는 문장에서 소름이 돋았다.  수필집을 읽었을 때 나는 서른이 좀 넘은 나이였다. 십 년씩 쓰고 바꾸는 노트북을 앞으로 2번이면 할머니가 되는 건가? ^^; 그래도 계속 글을 쓰고 있다면 참으로 마운 일일 것이다.

  벚꽃 사진을 찍다가 또 소름이 돋는다.

"그럼 이렇게 핀 벚꽃을 서른 번 보면 할머니가 되는 건가?"  



이전 10화 마흔이지만 혼자 노는 게 좋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