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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Aug 29. 2024

밤을 기다리는 너에게

분꽃

  기분이 상해버렸다.

베란다 화분에 분꽃은 피는데 향기가 나지 않다. 작년에 씨앗을 심고 꽃을 다 보고 나선 씨앗을 모아두었다가 같은 화분에 심었다. 늦봄부터 가을까지 분꽃은 매일 한송이 혹은 여러 송이가 피었다. 쉬는 날도 있지만  매일 꽃을 보고 싶은 내게 나팔꽃만큼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게을러 하루쯤 쉬고 싶은 날도 있지만 분꽃을 보면

"너는 오늘 무슨 꽃을 피웠니?"라고 묻는 듯했다.


분꽃은 내게 꽃 선생님이었다. 매일 내가 뭘 하나 지켜보는 남편만큼 꽃에게도 권위가 느껴졌다.


사실 분꽃에겐 향기가 나지 않는 것 말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분꽃과 나 사이엔 불순한 녀석이 있다. 나의 에너지를 뺏아가는 듯 분꽃의 수액을 빨아먹고 있는 못된 총채벌레다. 한여름에도 아침 일과는 분꽃 잎에 붙은 총재벌레 잡기였다. 스카치테이프를 빙돌려 손가락에 끼운 다음 잎사귀에 붙은 길쭉하고 얄밉고 검은 녀석들을 잡는다. 야비하지만 벌레를 두 손가락 사이에 두고 뭉개버리기도 했다. 사실 검은 먼지 조각 같아서 비벼도 느낌이 없다.


 나는 벌레가 미울 뿐이다.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작년 이맘때 수목소독을 할 때 문을 그대로 열어둔 것이 화근이었다. 창너머 느티나무에서 날아들어온 듯 한 총채벌레는 겨울을 보내고도 화분에서 버티고 올봄에 다시 나타났다. 성충이 잎 위에서 빨아먹고 생긴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화분에 옮겨가기도 하지만 총채벌레가 좋아하는 건 연하고 약한 새순이다.  분꽃만 키우고 있는 화분에서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매일 같이 벌레를 잡아주고 있는데 작년에 진하게 풍기던 향기는 나지 않았다.


 꽃은 보고 싶지만, 농약은 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아침 분꽃잎에 새로 붙은 벌레를 잡는다. 가끔은 한 마리도 없다 싶지만, 어김없이 다음날 잎사귀 하나가 점령당한다. 줄기가 길어지면서 벌레 먹은 잎은 잘라 주다 보니 꽃대에 달린 잎뿐이지만 대신에 통풍이 잘돼서 나쁘지 않아 보였다. 집 근처 산책길에 분꽃 군락지가 있다.


 향기가 왜 나지 않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작정하고 분꽃을 보러 나갔다. 오후 4시 꽃 (four o'clock flower)이 핀다는 분꽃은 쉽게 만날 수 있다. 동네 할머니들이 인기 품목이기 때문이다.   


  늦은 오후 비가 내리고 있지만 분꽃은 아직 생생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가까이 가지 않았지만 분꽃향기가 진동했다. 촉촉한 공기에 분꽃향이 섞여서 향수를 막 뿌린 듯 기분 좋았다. 집에 핀 분꽃은 향기를 뿜지 않는데 거리에 핀 꽃은 향기롭다니 섭섭했다.  


 분꽃은 향기가 나는 게 맞다. 그런데 나는 잊고 있었다. 분꽃은 달맞이꽃처럼 야행성이다. 늦은 오후에 피었다가 다음날 새벽까지 있다가 시들어 간다. 분꽃은 주로 밤에 향기가 강해진다. 낮에 피었다고 해도 저녁이 될수록 향기가 강해진다. 특히 한밤에 피는 분꽃은 향기가 더 진했다. 날씨가 너무 건조하면 향기가 덜나고 무더위에 꽃잎이 신선하지 못하면 향기도 약할 수밖에 없다. 종종 남편에 듣는 말이 있다.


 "너는 다른 사람 말 안 듣는다."


이상한 고집 덕분에 다른 사람 말을 잘 안 듣는 일이 많다. 그래서인지 이런 상황에서도 당장 결과만 보고는 생각이 뭉개지지 않는다. 차분하게 왜 그런지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을 말이다. 보고 싶은 대로 내 고집을 부리다 보니 꽃향기가 안나는 것도 문제로 취급하게 되었다. 내 생각이 잘 못되었다는 걸 전혀 궁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에 부끄러워졌다.


달리는 전철보다 서있는 몸이 더 흔들거렸다. 이른 아침을 좋아하던 나지만 요즘은 밤이 더 기다려진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나를 기다리는 가족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매일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잠들면 잠시 휴대폰을 들고 시간을 보낸다. 예전처럼 하루의 마지막을 글쓰기로 마무리하지는 못하지만 읽다만 책을 펼쳐보듯 여기저기 꽂아둔 책갈피를 찾아 다 못 본 글들을 읽는다.

  

밤이 오길 기다렸다.

오전에 널어놓은 베개 커퍼가 보송하게 말랐고, 베란다엔 분꽃이 세 송이 피었다. 몇 걸음 다가가니 금방 분꽃향이 느껴졌다. 꽃송이에 코끝을 대는 순간 향기는 더 강렬하게 머릿속까지 올라왔다. 분꽃은 향기로웠다. 의심할 필요 없이 산책로에서 맡은 분꽃과 같은 향기였다. 나만 몰랐다. 꽃이 피었다고 향기가 바로 나는 것이 아니었음을, 사람에게도 향기가 나는 때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 글에서도 향기가 났으면 싶지만, 글에서 풍기는 향내는 글이 쓰여 있다고 풍기는 것은 아니었다.



 베란다 창가에 분꽃 한송이가 피었다.

그리고 밤이 주는 포근함을 더 해주는 꽃향기를 맡으러 다. 밤에 피는 분꽃의 향기는 이불을 덮고 누운 듯 보드랍고 편안한 기분이 들게 한다.

이글거리는 여름 태양이 사그라지는 지금, 태양이 없는 흐릿한 온도에서 분꽃의 향기는 나를 더 가까이 잡아 는 듯싶다.


잠깐 분꽃향기에 졸음이 몰려왔지만 진한 커피를 마신 듯 짙어진 밤은 나를 더욱 각성시켰다.


까만 단어들을 모으고 '너를 기다리는 밤'을 쓴다. 분꽃처럼 늦은 저녁, 켜켜이 쌓이고 깊어져야 겨우 좀 맡을 수 있는 종이책의 냄새를 기다린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렸다.


모처럼 하루를 잘 보냈구나. 또다시 내일이 되면 나는 또 밤을 기다릴 것이다.  분꽃이 피는 늦은 오후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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