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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Sep 05. 2024

포기할 수 없는 너에게

해바라기

폭우가 쏟아지는 길을 달렸다. 양산을 들고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비를 피하러 간 상가 입구는 고요했다. 눈앞에 플라타너스 나무 두 그루가 다정해 보였다. 소나기를 구경하기 좋은 자리 같았다. 키와 모양이 비슷한 나무는 몇 해나 이곳에 같이 있었을까? 사람들이 세운 건물 보다 더 높은 걸 보니 그 보다 더 오래전 심었을 것이다. 거대한 나무는 나뭇잎을 이리저리 흔들며 구석구석 비 샤워를 하고 있었다. 소리를 내며 큰 해바라기 샤워기처럼  비는 뜨거운 공기 속에 잠시 미지근했지만 곧 차가워졌다. 비가 나를 꼼짝 못 하게  했지만, 어떤 거부감도 없이 비가 만든 섬에 있기로 했다. 그리고 섬에 나 홀로 있다는 기분에 누군가가  그리워졌다.


 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해바라기가 한눈에 나를 불렀다. 첫눈에 해바라기는 싱싱한 꽃잎 같았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아니었다. 잎은 갈기갈기 뜯기고 구멍이 나 있고, 꽃은 시들했다. 물을 충분히 먹지 못해서 그런지 잎에 난 상처가 무척 거칠어 보였다. 고개를 숙인 얼굴엔 해바라기 씨앗이 촘촘하게 박혀있었다.


가만히 보니 아직 피지 않은  꽃송이가 여러 개 붙어 있었다. 점점 꽃송이가 묵직해지겠지만 해바라기는 더 오래 단단하게 서 있었으면 다. 별일 없다면 작은 해바라기가 다 핀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아이들은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보듯 엄마인 나를 한없이 좋아해 주었다. 엄마가 완벽한 인격을 갖지 않아도 달콤한 솜사탕을 들고 있지 않아도 내가 눈앞에만 있으면 푹 안겼다.  절대자의 기분을 알 것도 같았다. 엄마가 설령 아프게 해도 아이들을 금방 용서를 해주니 말이다. 엄마의 모든 것을 흡수하고, 해바라기처럼  태양이 내는 열기를 그대로 받으면서 자라고 있다.


 오래전에 나도 아이였다.

누구라고 쓰는 일이 망설여지지만, 주어는 내가 아닌 가족 모두가 맞을 것 같다. 수시로 기분 바뀌는 이유를 전혀 모른 채 살얼음 위에 서 있는 듯한 집 안에서 자랐다. 차가운 냉기가 싫어서 찬 물도 마시지 않았던 나는 이불처럼 꼭 덮어줄 온기를 한없이 기다렸다. 나는 추위를 남들보다 더 타고, 여름은 남들보다 덜 탄다. 온기가 부족한 기분은 아직도 내 곁에서 찬바람처럼 오싹하게 한다. 그래서일까?


자연은 숨을 쉬기 좋은 곳이었고, 포근한 기분이 들게 했다. 따뜻한 태양을 좋아하는 꽃들처럼 난 따스한 계절이 참 좋다. 깜깜한 밤이 되면 한여름 무더위도 잊어버렸다. 그리고 꽃을 나무를 자연을 깊이 사랑하는 작가를 또 만났다. 아이들의 책을 빌리러 갔다가 만화로 엮은 이오덕 선생님의 책이 눈에 띄었다. 아침에 만난 해바라기를 보며  한없이 쓸쓸해졌는데 이오덕 선생님의 해바라기 이야기가 떠올랐다. 꺾인 채 꽃을 피운 해바라기를 보며 이런 글을 남기셨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합니다. 동생이 아파 병원에 가게 된다든지 흉년이 들었다든지 중학교에 진학을 못 하게 된다든지 하는 것이 모두 우리가 감당해야 할 어려움입니다. 그러나 이 해바라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도 이렇게 살아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아닌 일들에 얼마나 괴로워했습니까?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 해바라기 앞에 머리를 숙이고 뉘우쳐야 합니다. 한 포기 해바라기보다 우리는 결코 떳떳하게 살지 못했어요.

책 <이오덕선생님> 중에서


 다 자란 아이들이 부모 곁을 떠나듯 해바라기는 씨앗을 만드느라 고개를 숙다. 더는 태양을 보지 않아도 되는 꽃송이는 할 일을 거의 마친 듯 말이다. 시들어가는 해바라기는 아이들이 아니라 어느새 부모의 모습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아이들이 커 갈수록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말을 아끼는 엄마가 필요한 듯하다. 마냥 철부지 같아도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정직하고 인생의 정답을 잘 찾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부족한 기분이 들고 미안해지기도 했다. 나의 그늘진 구석을 들킬까 봐 걱정이 되었다.


쓰레기 섬에 갇힌 듯 서있던 해바라기가 있었다. 쓰레기더미 근처에 소리 없이 초록 기둥이 일어났다. 쭉쭉 올라간 가지 끝엔 쌍둥이처럼 똑같은 꽃이 피었다. 하지만 예전보다 쓰레기는 더 많아졌다. 공사자재부터 음식찌꺼기, 스티로폼, 음료수병이 뒹굴었다. 비닐봉지에 채워진 알 수 없는 쓰레기들 점점 어지럽게 쌓였다. 어쩌다 이렇게 까지 사람들은 쓰레기를 모아두는 걸까? 그 틈에 해바라기는 왜 피었을까? 아마 예전엔 화단이었을 것이다. 돌보지 않는 화단은 금방 야생초 덤불이 되었고, 여름이 되자 계절에 맞는 해바라기가 솟아났다. 그런데 해바라기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금방 쏟아질 듯 아슬아슬한 쓰레기 더미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쓰레기 안에 갇힌 해바라기를 보며 나도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내가 만든 감정에 둘러싸인 채 꼼짝하지 못하고 있으니...


 해바라기 잎에 난 상처처럼 내가 자라는 동안 겪은 일들은 감출 수가 없다. 그래도 해바라기는 해바라기가 아닌가. 아이들은 엄마를 보며 자란다. 엄마가 글을 쓰는 식탁에 마주 앉아서 엄마가 일이 끝나길 기다린다. 동그란 얼굴을 한 해바라기처럼 아이가 나를 보고 있다.



아이들이 나를 어떤 해바라기로 생각할까? 해바라기꽃 한 송이 따라 데려간 곳엔 비를 피해 서 있는 내가 있었다.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놀랐지만, 바짝 마른 대지가 금세 촉촉해졌고, 시들했던 식물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새들도 목을 축이며 더위를 피하는 듯했다. 그러는 동안 난 섬에 갇힌 채 빗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긴 호흡을 했다. 몇 주 동안 원하지 않는 전화들을 받아야 했다.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결국은 모두 품어야 했다.  나를 흔들었던 소동은 줄을 선 듯 찾아왔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는데 소나기 덕분에 자리를 벗어난 듯 시원해졌다. 일상에 돌아가지 못하는 시간이 마치 휴식 같았다. 바람처럼 달콤한 시간은 곧 지나갔다. 비는 점점 줄었고 금방 우산 없이 걸을 수 있었다.


 집 근처에 왔을 때  쓰레기통이 되어버린 화단의 해바라기는 갇힌 듯 답답해 보였다. 식물은 뿌리를 내리면 움직일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 자리가 어떤지 궁금했다. 땅을 뚫고 나왔는데 다른 꽃 친구도 없이 달랑 혼자라 외롭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혼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 준비한 꽃봉오리가 많았다. 해바라기가 준비한 것을 모두 보고 싶다. 그러고 보니 소나기가 나만 기쁘게 해 준 건 아니었나 보다. 깨끗한 물로 온몸을 맘껏 샤워한 듯 해바라기 두 송이가 웃고 있었다.  


해바라기는 포기하지 않았다. 얼굴을 들어 태양을 바라보며 힘을 내고 있었다. 야무지게 당찬 모습을 한 해바라기가 반가웠다. 어렵게 다시 찾은 기분 활짝 핀 해바라기처럼  선명하게 나를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천둥번개가 몰고 온 비가 시끄럽게 쏟아지던 날 영화처럼 해바라기 앞에서 작은 소나기를 만났다. 우산도 없었는데 걱정할 새도 없었다.  아기가 떼쓰며 울듯 너무 잠시 동안 머물고 가버렸다.


작은 소낙비가 물러나자 주변에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인생의 깊이를 알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의 눈물이 필요한 것이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 묵묵히 나의 자리를 지키고 선 해바라기처럼, 그래야 꽃이 필 테니까.


더는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해바라기가 나를 지켜보듯 말을 건다. 나도 잘 핀 꽃이었다.



한고비 넘기듯 내 감정도 이제 문턱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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