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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고 Oct 21. 2023

어쩌다 조개 채집



   해수욕장 개장을 앞둔 평일, 고요한 바다는 하릴없이 맑았다.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물결은 잘 닦은 유리처럼 윤기가 반질반질이고, 그 아래 깔린 모래는 고흐의 그림처럼 아스라이 흩날리는 생명력을 담은 채 전시돼 있었다. 도슨트는 차분하면서 일목요연한 파도 소리. 여름만 되면 당연하고, 당연하게 빠져드는 우리의 문화생활이다. 



   이맘때의 바다는 당최 빠져들지 않고 선 버텨낼 재간이 없다. 적당히 시원한 수온과 바람 한 점 없는 30도 정도의 날씨, 몸에 묻은 물기를 금방 증발시키는 햇빛의 조합이란 우리를 하염없이 바다로 잡아끈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척 수영복 바지를 입고, 수경을 호주머니에 넣은 다음 사천해변으로 갔다. 



   몇몇 서퍼들만이 지구를 반쯤 떼어낸 듯한 넓고 넓은 바다와 하늘, 그 사이 어디쯤을 점유하고 있었다. 얼른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어 곧장 바다로 뛰어갔다. 이번 여름을 앞두고 사천해변 모래 보수작업이 한창이더니, 야무지게도 했나 보더라. 부드러운 모래에 발이 걸려 넘어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나 다시 달렸다. 해변을 가로지르는 15초. 일상에서 낙원으로 여행 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달렸던 추진력을 그대로 발끝에 모아 점프. 74kg의 기쁨이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치는 순간 시원한 바다의 느슨한 밀도가 빈틈없이 나를 껴안았다. 손이 닿지 않고 눈으로 볼 수 없는 곳까지 힘껏 안기면, 나는 당당한 외계인으로 변한다. 땅에 발붙이고 중력과 삶의 무게를 버티며 살아가는 지구인에서 벗어나니까. 허우적허우적. 손에 잡히는 게 없어도, 서 있을 곳이 없어도, 앞이 캄캄해도 원래 물속은 그런 거라며 당당하게 앞으로 헤엄치는 외계인 말이다. 행성 이름은 낙원, 지구에서 불과 15초면 도착할 수 있는 신비한 그곳이 바로 나와 우리의 고향이다. 다만 산소가 조금, 아주 조금 부족해서 자주 고개를 내밀어 숨을 쉬어 줘야 하는 단점이 있다.



   어푸어푸. 산소부족으로 고개를 해수면 밖으로 내밀고 나서야 호주머니에 넣어둔 수경이 생각났다. 어? 없네? 그렇다. 눈앞이 계속 캄캄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수영했다. 휘적휘적. 아는 수영법은 평형밖에 없기에 개구리처럼 몸을 웅크렸다 펴기를 반복하며 수심이 적당한 곳을 찾아 이동했다. 바로 그때! 바닷속을 떠다니던 수경이 발끝에 걸렸고, 엄지발가락으로 침대 끝에 놓인 전기장판을 켜던 노하우를 발휘해 그것을 낚아챘다. 물 안에서 몸을 이리저리 꼬며 발끝에 걸린 수경을 손으로 잡았고, 때마침 수심도 목젖까지 차는 곳에 도착해 있었다. 수경을 눈에 단단히 고정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저항 없이 조류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大자로 바다에 엎드려 둥실둥실. 하릴없이 바닷속 그림을 감상했다. 해수면을 투과한 빛이 바닷속으로 들어와 모래 위에 비치면, 물결의 움직임을 따라 쉴 새 없이 형태를 바꾸는 그림이 완성된다. 그 모습은 마치 어릴 적 일요일 오후 놀이터 냄새 같기도 하고, 가장 설레던 어느 봄날 같기도 해서 설명할 수 없는 선명한 예쁨이다. 두둥실 떠서 그 예쁨을 감상하던 중, 웬 조개 한 마리가 모래에 박혀 있는 게 보였다.



   발을 뻗어 주변 모래를 휘적이니 딱딱한 조약돌 같은 것들이 한 아름 발끝에 걸렸다. 모두 조개였다. 몸을 앞으로 숙여 잠수해서 조개 하나를 어렵게 낚아챘다. 손가락 두 개 정도 크기의 비단조개였다. 오호라. 마치 노다지를 발견한 광부처럼 얼른 다시 잠수해 오른손을 뻗어 하나를 더 채집해 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잡아 올린 비단조개를 왼손으로 옮겨 잡았다. 두 마리의 조개가 저장된 왼손은 적당히 부풀어 있었고, 다시 잠수해 오른손으로 한 마리를 더 낚았다. 이미 머릿속으론 어떤 요리(술 찜, 파스타, 칼국수 등등)를 해 먹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 마리의 조개가 담긴 왼손은 슬슬 버거워했다. 호주머니에 넣자니 수경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빠질 것만 같았다. 다시 잠수. 이번엔 특히 큰 놈이 잡혔다. 왼손으로 네 마리를 모두 잡고 있으니 금방이라도 손가락 마디마디가 풀려버릴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호주머니에 넣고 다시 조개 채집을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을 잠수하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결국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조개들은 모두 빠지고, 왼손에 잡고 있던 조개들마저 허우적대다 놓치고 말았다. 남은 거라곤 주머니 끝에 걸린 작은 녀석 한 마리가 전부였다. 



   차라리 잘된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한 마리, 한 마리. 손쉽게 잡다 보니 욕심이 끝이 없었다. 첫 조개는 궁금하고 예뻐서 주웠었는데, 두 번째부터는 정하지도 못한 요리를 상상하며 쉴 새 없이 줍기 시작했다. 그러다 수영을 하기로 했던 애초의 목적은 잊은 채 모든 체력을 조개 줍는데 써버리고 말았다. 만약 조개가 호주머니에 계속해서 채워졌다면 그 아름다운 바다를 즐기지도 못하고 기진맥진 집으로 돌아왔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모든 조개가 달아나고, 하나만 남은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잡생각이 너무 많은 나는, 잠을 자려고 누우면 한참을 뒤척이며 내일 아침이면 잊어버릴 생각들을 쉴 새 없이 잡아 올리는 나는. 지구인일 때나 외계인일 때나 참 여전했다. 처음 했던 생각은 잊은 채 계속해서 그다음 생각과 또 그다음 생각을 이어가다 뭐 때문에 생각을 시작했는지조차 잊고 기진맥진해지니까 말이다. 결국 쓸데없는 생각들은 호주머니에 쌓아 둔 조개처럼 어디론가 떠내려갈 텐데, 왜 그렇게도 욕심을 내며 많은 생각을 했을까. 나는 네가 미워. 처음 했던 그 생각에 꼬리를 물고 진짜 싫은 걸까. 내가 미워해서 네가 떠나면 어쩌지. 너를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분명 있을 거야. 너를 미워하는 내가 나쁜 사람인가 등등. 정말 바보 같은 ‘다음’들을 줍느라 정작 나를 다독여 줄 여유는 안중에도 없었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 그래서 연습하고, 반복하고, 습관으로 만들면 없던 근육이 서서히 붙듯 조금씩 마음도 성장해 간다. 그러니까 앞으론 처음 했던 생각이 진실한 내 생각이라고 믿고 다음으로 따라붙은 수많은 생각들은 밀어내는 연습을 해야겠다. 처음 잡은 조개에 만족하고 그다음은 넓은 바다를 즐기는 것처럼. 첫 생각에서 딱! 멈추고, 그 이후의 생각들은 일상을 즐기고 행복을 발견하는 것에 활용하는 연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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