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고야 이제 남3 파도도 거의 죽었는데?”
“그지? 갯마을 가보자”
로로가 출발하고 그 뒤를 뒤따랐다. 남애3리해변에서 고개 하나만 폴짝 넘으면 갯마을해변이다. 3분이면 족한 거리를 2분 만에 도착해서 자갈 빼곡한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우리는 주차장과 해변을 구분 짓는 소나무 행렬 속을 가로질러 모래사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갯마을 역시 서핑을 타기엔 파도가 약해져 있었다.
“그러게 좀 일찍 나오지!”
로로가 바다에서 하나둘 나오고 있는 서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라고 왜 일찍 나오고 싶지 않았을까. 우선 새벽 2시까지 ‘월간바다’ 7월 호 교정을 마무리하고 디자인 작업을 했으며, 인쇄소 하드디스크에 안착시켰다. 그로부터 약 1시간 동안 기억도 나지 않을 인스타그램 릴스와 유튜브 쇼츠를 전전하며 짧은 웃음을 구걸하듯 스크롤을 내렸다. 그러다 스르륵. 눈을 뜬 건 오전 9시. 나름 선방했다고 생각했지만, 어라? 세수하려고 보니 수건이 없었다. 비어 있는 수건 수납장과 반비례로 빨래 바구니는 묵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일주일 동안 집안일을 내팽개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글 작업과 땡땡가게 일을 병행하는 건 기본이고 헬스는 추가, 얼떨결에 받은 지인 출판사 신간 도서 리뷰는 덤, 비염은 서비스. 그렇게 인심 좋은 밥집을 찾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시간을 집어먹다 결국 탈이 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고봉밥처럼 쌓인 빨래 바구니를 세탁기 주둥이에 탈탈. 액상세제를 콸콸. 모드는 쾌속. 시간은 45분. 섬유유연제는 아, 몰라.
기다리는 동안 냉동실에 얼려 둔 밥과 닭가슴살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모드는 해동. 시간은 15분.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을 켜서 카톡을 확인했다. 로로의 메시지 두 개가 와있었다. 내용은 ‘남3에서 타고 있을게’. 시간은 오전 5시 57분. 참, 부지런도 하지.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며 로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받지 않았다. 아직 바다에 있거나 아니면 집이나 차에서 자고 있을 게 뻔했다. 세탁기와 전자레인지는 듀엣곡을 열창하듯 각자의 소리를 내며 문제없이 돌아갔다.
밥을 다 먹고 빨래를 널기 위해 마당으로 나가려는 순간 로로에게 전화가 왔다. 한 손으론 빨래 바구니를, 한 손으론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마당 한 가운데 서서 웬일로 화창한 봄 하늘을 바라봤다. 햇빛에 한쪽 눈이 찡그려졌고, 약간 뜨거운 열기가 살갗을 더듬었다. 빨래하길 잘했다.
“로로야 잠시만, 뭐라고? 못 들었다.”
“뭐라 하긴 뭐라 해. 얼른 오기나 해라!”
갯마을을 거쳐 죽도해변으로 달렸다. 죽도의 파도는 고르지 않았지만, 나름 수려한 곡선을 그리며 힘 있게 서퍼들을 밀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포인트는 한두 곳밖에 없었고, 바늘구멍 같은 그 포인트엔 30명 남짓한 서퍼가 몰려 있었다. 그들은 1인용 놀이기구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일제히 수평선을 바라보며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의 파도가 한 명의 서퍼와 합을 맞추면 다음, 그다음 사람들이 순차적으로 라이딩 했다. 그마저도 파도가 죽어가는지 몇몇 서퍼들은 포인트를 벗어나 바다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아침엔 진짜 좋았는데, 다 죽었네, 다 죽었어.”
우리 뒤에 서 있던 뿅뿅가게 송이형이 팔짱을 끼며 말했고, 로로도 함께 팔짱을 끼며 맞장구쳤다.
“탈고 빨래하느라 늦었데요. 참, 나”
“새벽까지 일한 건 왜 빼는데. 거, 참”
“그거랑 그건 다르지.”
이번엔 로로의 말에 형이 맞장구쳤다. 혼잣말 같았지만 독특한 하이톤 때문에 상당히 선명하게 들렸다.
“그렇지, 그렇지. 다르지, 다르지.”
서핑에 미쳐 있는 사람들만이 구분하는 ‘그거’랑 ‘그건’, 평범한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거그거였다.
형은 밥이나 먹자고 했다. 당연히 형 가게에서 파는 음식을 함께 먹자는 줄 알았지만, 대뜸 자장면이 먹고 싶단다. 그럼 가게는? 질문을 하기도 전에 카운터 밑에서 주섬주섬 꺼낸 오래된 팻말을 문 앞에 걸더라. 팻말에 적힌 내용은 매우 짧고 간결해서 마치 군더더기 없는 한 편의 시와 같았다. 그만큼 단어 하나, 하나 속에 무언가 신비하고 의미심장한 뜻이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내용은 이랬다. ‘서핑하고 오겠습니다.’ 아, 이 얼마나 시적인가. ‘자장면이 상당히 먹고 싶다’라는 화자의 깊은 생각을 도저히 유추할 수 없는 글귀였다. 이러니 내가 언어 영역을 망쳤지. 그런데 그걸 본 로로는 무릎을 탁 치고 함박웃음을 뱉으며 말했다.
“하하하. 행님! 역시 자장면도 서핑의 연장선 아니겠습니까!”
로로는 언어 영역을 만점 받았을 게 분명했다.
인구해변 뒤편, 좁은 골목에 있는 구구반점에 갔다. 소문으론 익히 들었었지만, 첫 방문이었다. 어리바리 자리에 앉으며 메뉴판의 잔상이 눈에 들어왔다가 금세 사라졌다. 순간 무의식 속에서 말도 안 되는, 그래서 있어서는 안 될 미지의 생물을 본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곧장 고개를 돌려 메뉴판을 직시했다. 이런. 내가 지금 뭘 본거지. 자장면 3,000원. 짬뽕 3,500원. 간짜장 4,000원. 주인 어르신 부부께서 깜빡하고 20년 전 메뉴판을 안 바꾸신 줄 알았다. 하지만 두 분 모두 눈빛에 총기가 선명하고, 음식 만드시는 손끝에 힘이 가득했다. 그런 분들이 메뉴판을 손보지 않았을 리 없다는 확신이 들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간짜장에 계란후라이가 없어도 백번 천번 용서할 수 있었고, 자장면에 오이가 올려져 있어도 신나게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얼마나 감동적이었으면 단무지를 안 줘도 된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의 대단한 가격이었다. 우리는 구구반점에서 가장 비싼 간짜장 세 개를 주문하며 허세를 부렸고 내친김에 짬뽕까지 시키며 넘치는 재력을 과시했다. 맛이 없을 게 분명하다고? 천만의 말씀 되시겠다. 우선 간짜장이 먼저 나왔고 약 1분 30초 후에 짬뽕이 나왔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의 간짜장은 증발하고, 증발해서 흔적조차 안 남을 정도였다.
형은 불은 면발같이 어지럽게 부풀어 오른 파마머리를 스윽, 쓸어 넘기며 유유히 가게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로로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혼잣말 같은 배웅 인사를 던졌다. 크… 즈게 낭만 아이겠나.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이 낭만인지, 언어 영역을 말아먹은 나로선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 사이 죽도 파도는 완전히 죽어버렸고, 파도 상황을 볼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으로 확인한 다른 해변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로로는 배부르고 졸린다며 집으로 돌아갔고, 하릴없던 나도 집으로 돌아갔다. 구름 위에 떠 있는 태양은 여전히 쌩쌩했고, 덩달아 마음이 들뜬 나도 7번 국도 위를 쌩쌩 달리며 창문을 열었다. 따뜻한 바람이 굉음을 내며 차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배는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고, 밀려드는 바람들의 연약한 압력이 온몸을 주무르며 노곤함을 쥐어짰다. 솜이불같이 나른한 하품이 입안 가득 퍼졌다. 차 안에서 바라보는 강원도 풍경도 그 기분과 짝을 맞추듯 고요하게 눈부셨다. 길 곳곳엔 봄과 여름을 이어주는 꽃들이 지천이었고, 그 너머 넓은 들판에선 초록의 벼들이 제법 자라 있었다. 고운 바람의 손길이 벼 머리를 가지런하게 쓸어 넘기면, 기분 좋은 지 배를 까고 발라당 눕는다. 왼쪽으로 쓰다듬으면 왼쪽으로 눕고, 오른쪽으로 쓰다듬으면 오른쪽으로 눕고. 그렇게 드러난 배는 어찌나 매끄러운지 햇빛을 그대로 반사해 온 대지를 금빛으로 일렁이게 했다. 바다에서 사라졌던 파도가 땅 위로 올라온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빨래를 걷으며 냄새를 힘껏 들이마셨다. 그럼, 그것에 스며든 햇빛 향기가 축축했던 머리까지 뽀송뽀송하게 만든다. 비록 계획했던 서핑은 못했지만 상관없다. 빨래와 로로의 투정과 형의 낭만과 눈물 나게 저렴한 간짜장과 강원도의 풍경과 땅 위의 파도까지. 행복은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토록 평범한 일상 곳곳에 숨어 있었고, 누구보다 민감하고 생각이 많은 나는 누구보다 많은 행복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