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다시 한번 경로를 탐색한다면.

by 탈고

언제가 도착지를 상상하곤 했었다. 내가 안식을 찾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머무는 곳. 그곳엔 살아생전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이 오가며 내가 만들어 내는 음식을 먹고, 술도 한잔 하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대화를 주고받는 그런 도착지이자 종착역. 쉼터이자 나의 마지막을 정리할 곳.

누가 찾아오고, 어떤 음식을 내놓으며, 냄새는 어떨까, 어떤 대화에 어떤 단어들을 주고받으며, 어떤 취향으로 나이를 먹고, 어떤 술을 마실까를 조금씩 구체화시키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그리고 그 꿈에 다다를 수 있는 수단이 잡지사의 에디터이자 편집장이라는 최종적인 직업이었다.
그렇게 대학은 뒷전에 두고, 독집 잡지를 낸답시고 부산을 쥐 잡듯 들쑤시고 다녔었다.


과거가 되어 버린 그 당시의 열정은 점점 선명해지는데, 앞으로의 나의 열정은 무디면서도 위태롭게 느껴진다. 잘리지 않고 으깨질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힘주어 고기를 찍어 누르는 이 나간 칼날 같은 것이 눈앞에 뻗어 있는, 그런 느낌이다.


싱싱하게 살아 숨 쉬던 날것의 젊음을 무엇 하나 버릴 것 없이 발골하여 뚝딱 요리해 내던 날카롭고도 예리한 그때의 감각과 열정에 집중과 집착을 하곤 한다. 실패했던 아픔과 좌절했던 슬픔과 실망했던 나의 능력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어서 일까. 서슬 퍼렇게 번쩍이던 그때의 날 선 열정이, 그보다 더 번쩍이던 눈으로 꿈을 향해 질주하던 나의 섬광이 자자드는 해무 속의 등대빛처럼 나의 일상과 일상 사이를 파고든다.



한동안 길을 잃고 표지판 없는 길을 떠돌다 삼천포로 빠졌다. 무엇하나 정해 진 것 없던 한 치 앞의 미래에 조금씩 뚜렷해지는 것이 생기고 있다. 그때도 그랬듯, 남들이 가는 길로 나를 안내할 일은 없다. 그때처럼 실패가 기다리는 길 일 수도 있고, 언젠가처럼 사기꾼과 모사꾼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안내할 수도 있다. 안전과 안정과 불만과는 거리가 먼 길일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언젠가 상상하던 그곳으로 다시 출발해 보고 싶다.


그리움에 대한 미련이라면 그래도 좋다. 실패에 대한 복수라면 그래도 좋다. 또다시 도전을 겁내고 앉아 있는 지금의 나에게 내리는 형벌이어도 좋다. 다만 즐거웠으면 좋겠다. 언젠가 허름한 술집에서 꿈에 대해 밤새 이야기하던 스물의 아이처럼 즐겁게 삶을 상상하게 된다면, 그렇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삶을 대할 수만 있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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