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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욕심많은워킹맘 May 20. 2018

욕심은 많지만 부족한 나, 한번은 마주해야 하는 열등감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친구들과 모임을 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캄캄한 밤인데도 수많은 아파트가 즐비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거리에 켜진 가로등과 함께 어두운 저녁 밤을 환하게 비추는 멋진 야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와! 야경이 너무 멋지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참 좋겠다. 매일 밤이 되면 이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이 수많은 아파트 속에 내 집 하나 없다니까 갑자기 서글퍼진다"

그때 우리가 향하는 집은 신혼집이 아니라 시댁이었다. 젊음과 사랑을 혼수로 시작한 서른 살의 남자와 스물넷의 여자는 워낙 '없이' 시작한 결혼이었다. 모아 놓은 돈도, 그렇다고 양가 어른들이 보태줄 형편조차 되지 못해 시댁에 들어가 살았다. 우리가 지낼 신혼 방에 들여놓을 가구만 사놓고 시작한 신혼집, 아니 시댁 생활이었다. 그래도 시댁이 남편 직장과 가까운 거리에 있음을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사회 초년생 시절, 인터넷으로 주민등록 등본을 발급하려다 우연히 클릭을 잘못하는 바람에 과거 주소 변동 이력까지 출력하게 되었다. 끝날법한 프린트 작동이 생각보다 길었다. 출력된 나의 등본을 보고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이렇게나 많이 이사했단 말인가?'

친정 부모님은 내 집 마련이 비교적 많이 늦은 편이었다. 친정 부모님이 내 집 마련에 성공하기까지 2년마다 이사 다닌 과거 집 주소들을 훑어보게 되었다. 내 집이 없다는 서러움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경험했다. 결혼 전, 5년 동안 근무한 회계 사무실은 업무 특성상 야근이 잦은 직업이었다.

그럴 때면 퇴근길에 같은 동네에 사는 여직원들끼리는 함께 택시를 타고 다녔다. 그런데 그동안 나는 목적지가 3번 넘게 바뀌었다. 그럴 때마다 목적지를 달리해서 택시를 타고 가는 시간이 왜 그렇게 창피하고 부끄러웠던지, 가난이 죄는 아닌데 말 못 할 불편한 감정을 가졌다.

친구들 중에서 제일 먼저 결혼한 우리 부부다. 시간이 흘러 하나둘 결혼하는 친구들은 어떻게 시작하는지 무척 궁금했다. 시댁의 자금 조력 덕분에 아파트 전세부터 시작하는 친구, 혹은 둘이서 모은 자금과 시댁의 도움과 함께 신혼부터 내 집으로 시작하는 친구, 출발점부터 다른 결혼이었다.

부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결핍과 많은 열등감을 느꼈다. 인생이 장거리 마라톤이라면 마치 이건 시작부터 불공평한 달리기였다. 그들은 5천만 원이든 1억에서 시작하는 장거리 마라톤이라면 나는 '0'에서 시작하는 인생 달리기, 나에게 너무나도 불공평한 인생이라는 열등감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남편의 직장이 다른 곳으로 신축 이전하면서 출퇴근이 힘들어졌다. 그때부터 분가를 계획하고 남편 직장 근처에 있는 아파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남편은 당연히 전세 위주로 아파트를 보고 있었는데 나는 기어이 매매를 고집했다.

내 집 없는 서러움, 2년마다 이사를 해야 하는 불편함을 결혼 후까지 연장하기 싫었다. 무엇보다 그 결핍과 열등감을 내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때 당시 내가 임신 6개월이었는데 그 욕심이 내겐 뱃속에 품은 큰 아이에 대한 모성애의 일부분이었을지 않았을까?

내가 매매로 보자고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자, 남편도 수긍하기 시작했고 그 뒤로 매매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집이 마음에 들면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았고 가격이 맞으면 집이 형편없었다. 무거운 몸으로 책상에 앉아 온종일 부동산 광고 검색을 하고 남편은 내가 조율한 매물을 확인하러 직접 발로 뛰어다녔다. 그렇게 발품 팔다 세대 수가 적은 아파트를 매매했다.


처음 받아보는 큰 대출금이 부담스러워 악착같이 빚을 갚아나갔다. 그 사이 큰아들이 태어났고 1층이라 신나게 뛰어놀며 눈치 볼 것 없이 편하게 키웠다. 등기를 마친 후 3년 반만에 대출금을 모두 갚았고 구입 당시 아파트 가격보상승해서 차익을 두고 매매했다.

그 자금을 토대로 냉장고 벽면에 붙여둔 분양 광고 전단지를 보고 매일 상상했던 새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결혼할 때만 해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지금이다. 과연 나는 살면서 내 집을 소유할 수 있을지,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결혼 생활을 우리는 철없이 시작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느껴질 때도 많았다.  

하지만 내 집에 대한 결핍을 느껴보지 못했다면 안정적으로 전세를 알아봤을지도 모른다. 내 집이 없는 서러움과 큰 불편함에 나아가 거기에 따른 결핍감이 얼마나 큰지 잘 알기에 매매를 고집했었다. 다행히 내게 그런 결핍이 있었기에 지금 오늘의 안정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내가 느낀 결핍과 열등감은 결국은 내게는 삶의 영양분이 되었다.




결혼 전까지 다닌 직장에서 직원 중 유일하게 나 혼자 '고졸'이었다. 대부분 학사 학위, 혹은 전문학사학위였고 그중 막내인 나만 '고졸'이라 학력에 대한 열등감이 컸었다. 일에 대한 흥미와 재미를 발판 삼아 친구들보다 3년 늦은 나이에 야간 전문대에 입학했다.

부모님 도움 없이 내 돈으로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기에 장학금이 절실했다. 그때야말로 '주경야독'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낮에는 직장인으로 저녁에는 학생으로 살면서 첫 시험 후 반에서 2등이라는 성적으로 장학금을 탈 수 있었다. 졸업에는 전 과목 A+ 성적으로 학업을 마무리했다.

또래 친구들처럼 스무 살 나이에 대학을 입학하고, 부모님이 당연한 듯 마련해주신 대학 등록금이었다면 그리 장학금이 절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신나게 청춘을 즐기다, 대학 졸업증명서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열등감과 결핍은 늘 내 곁에 존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 회사에서 근무하는데 해외영업부서 여직원들은 모두 2개 국어가 기본으로 가능하다. 회계부서에 근무하는 나는 한국어만 가능하다.

여기에 열등감을 느낀 나는 영어 강의 수강권을 등록했다. 매일 아침 설거지를 하거나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는 순간 블루투스 이어폰을 연결해서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또 점심 시간이면 혼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하고 영어 공부를 한다. 나만 한국어만 할 줄 안다는 이 열등감은 내가 뒤늦게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열등감은 항상 나를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결핍을 인정하는 순간, 더이상 결핍이 아니다. 그때부터는 지금 내가 성장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내게 없다는 결핍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뒤떨어진다는 열등감은 어쩌면 지금 내가 성장해야 하는 또 다른 기회라고 받아들이면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 나는 앞으로 많이 부러워하고 열심히 선망하려고 한다.

심리학자 아들러의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다"라고 강조했다.

결핍과 열등감이 있었기에 욕심이 많은 내가 그 부분을 채우려고 노력했던 부분들이 결국에는 모두 다 긍정적인 삶의 결과로 다가왔다. 대부분 사람은 결핍이나 열등감 앞에서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

첫 번째 경우는 결핍에만 집중하고 비교의식에 빠져서 남들보다 부족한 능력을 열등감으로 소비적인 에너지를 쏟는 것, 두 번째 경우는 결핍과 열등감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산적인 에너지를 전환 시키는 것. 이 두 가지 중 어떤 에너지를 쏟는 사람이 바라보는 삶의 무대는 열정적으로 변할까?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기 나름이다.

"질투 대신 선망하라. 타인의 성취를 인정하라. 설령 그 성공에 문제가 많아 보일지라도 그대는 오히려 그에게서 존중할만한 점을 애써 찾아, 그것을 배워라. 한껏 부러워해라. 그래야 이길 수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김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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