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한국, 일본 등 극동아시아에서 천天은 맥락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쓰입니다.
첫째, 하늘 저편에 계신 하느님. 극동아시아의 선조들은 머리 위에 퍼져 있는 하늘 저 너머 어딘가에 우주와 자연을 창조하고 주재하는 절대자가 있다고 직관적으로 믿어왔습니다. 이때의 천天은 천제天帝, 상제上帝, 조물주造物主, 조화신造化神, 조화옹造化翁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조화옹造化翁은 하느님은 당연히 나이가 많을 거란 생각에 노인(옹翁)으로 칭한 것이죠. God, Creator, King of Heaven 등. 유일신 개념과는 조금 다르지만, 모두 최고의 신 개념입니다.
둘째, 신神을 대체한 의미로도 쓰입니다. 인도에서 유래한 브라흐마(범천), 프리티비(지천), 수리야(일천), 찬드라(월천), 인드라(제석천), 아그니(화천), 야마(염마천), 니르리티(나찰천), 바루나(수천), 바유(풍천), 바이스라바나(비사문천), 시바(이사나천) 등을 한자로 번역할 때 흔히 사용됩니다. 천지天地 같은 낱말은 우주와 자연을 한꺼번에 일컫는 말로 흔히 쓰이고, 저승과 이승을 망라한 세계 전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후자의 경우 천天은 신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지地는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각각 의미합니다.
천지신명天地神明이란 천지조화를 다스리는 신령을 뜻하는데, 이때도 맥락에 따라 최고의 신을 가리킬 수도 있고 범신론적으로 두루두루 모든 신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셋째, 천국天國의 줄임말로도 쓰입니다. Heaven. 예수께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을 쓰신 걸로 보아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 사회에서 하늘과 천국의 조합은 동서를 막론한 표현 방식 같습니다.
넷째, 그냥 공간으로서 하늘을 가리키는 용도로도 널리 쓰입니다. Sky.
천天 사상이 존재했기에 생겨난 개념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천명天命. 하늘의 명령이란 뜻을 지닌 이 낱말은 셋으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명령. 운명이나 숙명으로 봐도 좋습니다. 비슷한 개념으로는 소명召命이 있습니다. 소명은 본래 임금이 신하를 부르는 명령이란 뜻인데,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하라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일을 가리킵니다.
둘째, 인간의 수명.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 해서 사람의 수명이 하느님께 달려 있다는 사상입니다. 천수天壽라고도 해요. 60세에서 70세 사이를 보통 사람의 수명으로 보고 70세를 넘기면 장수로 보았습니다.
셋째, 천자天子의 명령. 여기서 천자天子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라는 뜻으로, 주로 임금을 가리킵니다.
고대 동아시아인은 사람을 왕좌에 올리는 이도 하느님이고 내리는 이도 하느님이라 믿었습니다. 이 점은 고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 분열왕국의 왕들을 기록할 때 경전 기록자들은 어김없이 신의 뜻을 거론합니다. 유일신을 믿지 않는 민족들도 각자의 최고신에게 같은 사고방식을 적용하니 특별한 현상은 아닙니다.
천자天子. 바로 이 개념이 18세기말에 불교 암자인 천진암(현재 주소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로 1203)과 불교 사찰인 주어사(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앵자봉 동쪽 기슭에 있었던 사찰)에 모인 학자들이 감격하며 일제히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상적 바탕입니다. 하느님의 성품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거룩한 하늘의 아들. 이제껏 존재했던 어떤 임금과도 다른 선하고 정의로운 천자. 성천자聖天子!
천天 사상은 도道 개념도 낳았습니다. 도道는 극동아시아의 신비로운 사상가 노자老子가 우주의 진리를 칭할 때 사용한 용어이기도 합니다.
중국 역사에서 노자로 추정되는 사람은 크게 셋입니다. 공자孔子(BC552~479)에게 예를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초나라 사람 이이李耳가 첫째이고, 공자와 동시대 인물이라는 노래자老萊子가 둘째이며, 공자 사후 100년 뒤에야 나타나는 주周 나라 사람 태사담이 셋째입니다. 생몰연대가 분명한 한비자韓非子(BC280~233)가 도덕경을 인용했으니 한비자보다 앞선 세대임은 확실합니다. 노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존경을 받아 당나라와 송나라에선 그를 추존황제로 받들었습니다.
도道는 길(road)과 진리(truth)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중국어 성서는 요한복음 첫 문장에 등장하는 로고스(Logos)를 도道로 번역했습니다. 한국어 성서는 ‘말씀’으로 번역했습니다.
“太初有道, 道与神同在, 道就是神.”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느님이시다.”
성인聖人. 노자는 그의 저서 『도덕경』에서 성인이란 낱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성인은 거짓 없이 행하고 말하지 않고도 가르친다. 모든 것을 만들면서도 말하지 않고, 낳으나 가지지는 않고, 위하되 의지하지는 않고, 공을 이루고도 거기 머물지 않는다.”(2장), “성인의 다스림이란 마음은 비우고 배는 채우며 뜻은 약하게 하되 뼈를 강하게 하느니라.”(3장) 노자에 따르면 성인은 지극히 겸손한 성품을 지녔으며 위무위為無為로 백성을 다스리는 자입니다.
한반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극히 적은 정보에서 위무위為無為를 실천하는 성인의 구체화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임금이 제 백성을 위해 극형을 감내한 사례는 그들로서는 전례가 없는 역사였습니다.
리理는 중국 남송(1127~1279)의 주희朱熹(1130~1200)가 성리학을 집대성하는 과정에서 “천天은 이理”라고 선언함으로써 천天 사상에서는 떼놓을 수 없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리理는 서양철학의 Logos와 근접한 개념으로 봐도 크게 어긋나지 않습니다.
천령天靈. 하느님 또는 신령의 기운이라는 뜻으로 곳곳에서 사용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테면, 고려시대 팔관회八關會. 이 낱말이 성령聖靈처럼 창조주의 신성한 기운이라는 맥락으로 사용된 건 19세기말 한반도에서 생겨난 동학에 이르러서 같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천天 사상은 천주天主, 천자天子, 천령天靈의 인식구조로 발전해왔습니다. 특히 천天은 그 뿌리가 깊어 지금도 극동아시아 한중일 삼국의 사람들에게 “하늘 무서운 줄 알아라!” 같은 말은 그들의 양심을 자극할 때 가장 효과적인 표현입니다. 천天은 그들에게 여전히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