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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용선 Dec 11. 2024

삼강오륜과 예수 그리스도

공자의 가르침을 가장 간단히 요약한 개념이 삼강오륜三綱五倫입니다.     


삼강三剛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으로 임금은 신하에게, 부모는 자녀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각각 근본 뼈대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번역할 때 임의로 상하구조 개념을 끼워 넣으면 봉건관념이 되어버립니다.

강綱은 벼리 즉 ‘그물에 있어 근본이 되는 굵은 줄’을 뜻하는 낱말이니 비유적입니다. 맹자가 굳이 강綱이란 말을 사용한 취지는 매우 분명합니다. ‘더불어 그물을 이룬다’는 속뜻을 품기 위함입니다. 군신의 그물, 부자의 그물, 부부의 그물. 권력이 있는 쪽이 먼저 근본이 되고 지침과 법도를 마련해 주어야 하는 솔선수범의 뜻을 함축합니다. 공자의 다른 말이 생각납니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녀는 자녀답게. 君君臣臣 父父子子.     


삼강三剛이 원리라면 오륜五倫은 규범에 해당합니다.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올바름이 있어야 한다.

부부유별(夫婦有別).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붕우유신(朋友有信). 친구 사이에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오륜에는 각각 키워드가 있습니다. 친함, 올바름, 구별, 질서, 신뢰. 그리스도교가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극동아시아에 정착할 때 오륜의 다섯 가지 키워드는 매우 훌륭한 밑거름이 되어 주었습니다.      


친親. 부모와 자식 하면 효부터 떠올리기 쉬운데, 친함이 먼저입니다. 자녀에게 유형무형의 폭력을 휘둘러 친함을 깨뜨리는 부모는 자녀의 친근 표현인 효를 돌려받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자애롭고 공평한 아버지로서 민중에게 전했습니다. 유대교가 대중에게 심어놓은 처벌하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뒤집고자 했습니다. 이후 기독교 역사와는 별개로.     


의義. 임금과 신하 하면 충성부터 떠올리기 쉬운데, 그에 앞서 올바름이 존재해야 합니다. 의롭지 않은 군주는 신하와 백성에게서 충성을 돌려받지 못할 것입니다.

히브리인에게 메시아(그리스도)는 국왕, 제사장, 선지자 등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기초가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는 신념이니 ‘군위신강’과 ‘군신유의’는 기독교가 가장 먼저 통과한 시험대입니다.     


별別. 부부 관계에 구별을 중시함은 남녀의 다름을 전제한 것입니다. 유교를 성차별 이데올로기의 근거로 악용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건 하층민 사이에서나 통했던 얄팍한 논리를 답습한 결과입니다. 사대부는 부부간 존중이 매우 엄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베드로가 신자들에게 편지로 남긴 글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남편들아, 너희 아내와 함께 지내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고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의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아내를 홀대하면 기도가 막힐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생각나는 문장입니다.     

서序. 어른과 아이 하면 예의부터 떠올리기 쉽지만 오륜은 질서부터 언급합니다. 어찌 보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해야 할 예의를 더 중시하는 것도 같습니다. 나이와 직위 등을 내세워 사회 질서를 무시하는 윗사람은 아랫사람들의 친근 표현인 예의를 돌려받지 못할 것입니다. 숨만 쉬면 저절로 먹는 나이를 들먹이며 무례하게 구는 어른은 꼴불견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세족례 장면이 떠오릅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 또는 선생으로서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이 옳다.”     


신信. 친구 사이를 말할 때도 공통의 목적 따위 현실적 개념보다는 믿음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누군가 나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언행을 했을 때 내 머릿속에 그와 관계를 단절할 생각보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하는 생각부터 들면 내가 그를 친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또한 내게 그렇다면 그와 나는 친구입니다. 둘 사이에 믿음이 있으니까요.

“내 계명은 이것이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내 계명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가 내 하느님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알려 주었다.”     


대장부 공자와 天子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를 초월한 만남은 그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16세기 중국 대륙에선 명나라 황제가 천주교회당을 세워주었고, 한반도에선 18세기에 선교사 없이 신앙 공동체가 스스로 생겨났습니다. 이 공동체는 가톨릭 교단이 흡수했지요. 1883년에는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황해도에 최초의 개신교회인 소래교회를 세웠습니다. 솔내교회, 송천교회라고도 합니다. 설립 이듬해에 초대 목사로 매켄지 장로교 선교사가 부임했으며 그는 과로, 영양실조, 일사병으로 인한 정신착란증을 겪다 1895년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매켄지의 1885년 동학운동 목격담을 실은 신문 ‘배택 테리폰’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의 약혼녀 엘리자베스 맥컬리도 훗날 조선에 와서 32년(1909~1941) 동안 한국 개신교회에 헌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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